직부첩(直赴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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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시나 전시에 직부한 사실을 증빙하는 문서.

개설

직부회시는 1차 시험인 초시를 면제받고 곧바로 회시에 응시하는 것이고, 직부전시는 2차 시험인 회시를 면제받고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는 것이었다. 직부전시는 전시가 시행되는 문과와 무과에만 적용되었다. 직부 자격을 주는 것은 왕이 은전을 베푸는 것이기에 직부첩은 명목상 교지(敎旨)였다. 처음에는 격식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1784년부터 첩문의 규식이 정하여졌다.

직부첩의 발행은 승정원에서 하고, 관리는 예조에서 하였다. 무과는 승정원에서 증명서를 내주고 병조에서 명부를 만들어 비치하였다. 과거에 임하여 대조하고 응시를 허락하였다(『정조실록』 18년 3월 3일).

연원 및 변천

직부첩은 명색이 교지임에도 질이 나쁜 종이에 자획도 고르지 못할 뿐 아니라 나누어 줄 때 격식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1784년(정조 8)에 규식을 정하고 첩문은 간인(刊印)하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판본(板本)은 매번 사용한 후에 대내(大內)로 들이고, 반상(頒賞)할 때는 내갈 것을 청하여 낙인(烙印)하는 관례에 따르도록 하였다(『정조실록』 8년 8월 27일).

과거를 치른 후에는 성균관으로 하여금 직부첩을 빠짐없이 거두어들이게 하여 이상 유무를 대조하여 확인한 뒤에 초기(草記)를 올리는 것이 규정이었다. 성균관이 거둔 직부첩을 예조로 보내면 예조에서 정한 규식에 의거하여 폐기하였다.

처음에는 직부회시나 직부전시 모두 식년시에만 응시하게 하였으나 차츰 증광시와 별시·정시에도 응시가 가능해져 조선후기에 가면 직부첩의 발행이 급증하게 되었다.

형태

1784년에 정해진 규식에 의하면 연호(年號) 다음에 승지(承旨)와 주서(注書)를 열서(列書)하고 서명처럼 착함(着銜)하는 것을 규례로 정하였다. 교지라고 칭하는 홍패(紅牌)와 직부첩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직부첩의 첫머리에 봉교(奉敎)라고 쓰도록 하였다(『정조실록』 8년 8월 2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