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희당(重熙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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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중희당 |
한글표제 | 중희당 |
한자표제 | 重熙堂 |
상위어 | 동궁(東宮), 창덕궁(昌德宮) |
관련어 | 보루(步樓), 삼삼와(三三窩), 석유실(錫類室), 소주합루(小宙合樓), 유덕당(維德堂), 육우정(六隅亭), 주합루(宙合樓)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 |
집필자 | 신지혜 |
건립시기/일시 | 1782년(정조 6) |
장소 | 창덕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7칸/측면 2칸 |
양식 | 팔작지붕 |
관련 인물 | 정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중희당(重熙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 『정조실록』 4년 7월 13일, 『정조실록』 4년 8월 29일, 『정조실록』 6년 9월 7일, 『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정조실록』 8년 8월 2일, 『순조실록』 27년 2월 9일 |
1782년(정조 6)에 창덕궁에 조성된 동궁의 정전.
개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동쪽에 왕세자를 위해 건립되었다. 창덕궁의 동궁은 원래 건양문 밖에 저승전(儲承殿)을 중심으로 시민당(時敏堂)을 정당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757년(영조 33)에 낙선당(樂善堂)이 화재로 소실되고 뒤이어 1764년(영조 40)에 저승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되지 않았다(『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 1780년(정조 4) 7월에는 시민당까지 화재로 소실되었다(『정조실록』 4년 7월 13일). 시민당이 소실되자 바로 복구하기 위해 중건도감을 설치하고 재목의 벌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한 달 후 시민당 중건을 중지하였고 이후로 재건되지 않았다(『정조실록』 4년 8월 29일). 이로써 성종 연간에 건축한 창덕궁의 동궁 주요 전각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1782년 9월 7일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하자(『정조실록』 6년 9월 7일) 원자를 위해 중희당을 건립하였다. 중희당의 건립은 동궁 영역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희당은 과거 건양문(建陽門) 밖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쯤으로 창덕궁의 동남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동궁의 정당으로 조성된 시민당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창덕궁과는 그 좌향을 달리하였다. 시민당의 동쪽에 춘방인 세자시강원과 계방인 세자익위사가 있어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배치되었다. 중희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며 왕의 편전인 희정당과 대내의 정전인 대조전(大造殿)과 매우 가까웠다. 창덕궁의 대비전인 통명전(通明殿)과도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았다.
1785년(정조 9) 8월 중희당의 동남쪽에 수강재(壽康齋)를 건립하였다(『정조실록』 9년 8월 27일). 왕의 서재이자 장차 왕세자의 학문과 관련한 장소로 염두에 두고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왕과 왕세자의 학문 공간을 가까이 두어 정치적 사상의 기반을 동일하게 하고자 하는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자가 3살이 되던 1784년(정조 8) 8월 2일에 중희당에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정조실록』 8년 8월 2일). 그러나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에 죽자 중희당은 동궁으로의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786년부터 왕의 편전과 같이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고 강서를 읽는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하였다(『순조실록』 27년 2월 9일).
위치 및 용도
중희당은 과거의 시민당과 달리 궁궐의 중심으로 한층 진입한 위치에 있다. 왕의 편전으로 주로 사용하던 희정당 가까이 성정각(誠正閣) 바로 동쪽에 위치하였다. 사용 사례를 보면, 정조는 중희당 건립 이후 1784년(정조 8)부터 1800년(정조 24)까지 거의 매일 중희당에서 승지(承旨)를 들이고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의하였다.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고 11월에 정조의 재궁이 건릉(健陵)에 묻히는 날, 순조는 이곳 마당에서 망곡례를 행하였다. 행궁에서 초우제를 지냈기 때문에 순조는 중희당 마당에서 망곡례를 행하였다. 순조 역시 이곳을 편전과 같이 신하를 만나고 경서를 읽는 곳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그 외에 1804년(순조 4) 3월 17일에 숙선옹주(淑善翁主)의 부마를 재간택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866년(고종 3)에는 왕비의 초간택 장소로 사용되었다. 헌종은 정침으로 거처하였으며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중희당을 왕세자가 사용한 사례로는 순조대인 1827년(순조 27)부터 1830년(순조 30)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 왕세자 청정 절목에 따르면, “왕세자가 청정하는 처소의 정당(正堂)은 중희당으로 하고, 별당(別堂)은 수강재(壽康齋)로 한다.” 하고 규정했으며 청정 시의 좌향은 서향으로 하였다. 효명세자는 1827년 2월 18일에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조참을 시행함으로써 청청을 시작하였다. 그해 6월에는 왕세자가 중희당에서 도목정사를 행했다. 1829년(순조 29) 1월 1일에는 왕세자가 왕 대신 진하(進賀)를 받았다.
변천 및 현황
1782년(정조 6) 처음 건립될 때, 중희당과 그 동쪽으로 소주합루(小宙合樓)가 있고 소주합루로 올라가는 보루(步樓)인 삼삼와(三三窩), 육우정(六隅亭)이 있었다. 1827년 중희당의 북쪽에는 ‘ㄷ’자형으로 유덕당(維德堂)과 석유실(錫類室)을 조성하였다. 중희당의 북쪽에 유덕당이 있었으며 유덕당과 중희당 서쪽을 남북축으로 길게 연결하는 행각에 석유실이 있었다. 현재 창덕궁에 중희당은 없으며, 삼삼와와 소주합루만 남아 있다.
형태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것으로 보아 정면 7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성된 대규모 전각이다. 또 기단은 매우 높이 형성되어 장대석을 9단 쌓아 올렸다. 마당은 매우 넓으며 측우기 등의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들이 놓여 있어 왕세자의 학문 장소로의 상징성을 드러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김동욱, 「조선 정조조의 창덕궁 건물구성의 변화」, 『대한건축학회논문집』97,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