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中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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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시험의 두 번째 시험인 편전의 과녁으로 활용된 사각형 천으로 된 목표물.

개설

무과 시험의 두 번째 실기 시험인 편전(片箭)을 쏠 때 사용한 과녁의 이름을 말한다. 편전은 ‘애기살’이라고 불릴 만큼 일반 화살에 비해 짧은 화살을 통아(桶兒)라는 긴 대롱 형태의 덧살에 끼워 쏘는 방식이었다. 편전은 짧지만 관통력과 정확도가 우수하여 정밀 사격에 사용되었다. 특히 다른 화살의 경우는 발사 후 날아가는 모습이 육안으로 확인되지만, 편전은 빠른 속도와 짧은 크기로 육안 확인이 불가능하여 조선의 비밀병기로 인정받았다.

연원 및 변천

중후(中侯)는 무과 실기 시험의 두 번째 시험인 편전에 활용된 과녁의 이름으로 원후(遠侯)와 근후(近侯) 중간에 설치된 활 과녁이라는 뜻이다. 몇 겹의 천을 덧대어 사용하고 푸른 바탕의 정중앙에 작은 사각형의 중심부를 만들어 쏘게 하였다. 세종대까지는 중후의 중심에 사방 4척 6촌 크기의 사각형 안에 돼지 머리[豕頭]를 그려 넣어 중심으로 삼았지만, 세조대부터는 돼지 머리를 그리지 않았다. 또한 원후와 근후는 화살의 비거리에 따라 점수를 주었기에 목표물의 앞과 뒤에 깃발을 세워 화살이 떨어진 위치를 확인하는 보조 표적으로 삼았다. 반면 중후의 경우는 정확도를 핵심으로 했기에 중후 이외에는 보조 표적을 세우지 않았다(『세조실록』 2년 2월 21일).

첫 번째 시험은 원후라 해서 240보 거리에 표적을 세워 나무촉을 사용하는 목전(木箭)을 쏘았다. 원후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1장(丈) 8척(尺)이며, 그 너비를 3등분해서 정중앙에 정곡(正鵠)이라 하여 사방 6척의 사각형 흰색 가죽을 덧대고 돼지 머리를 그렸다. 원후는 가장 먼 거리이기에 원후가 설치된 좌우 5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을 확실히 구분하도록 하였다. 역시 원후의 뒤쪽 90보에도 좌우 7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다. 근후는 가장 가까운 과녁으로 사단에서 80보 위치에 설치하였으며, 가장 무거운 철전(鐵箭)으로 시험을 보았다. 과녁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4척 6촌이며, 중앙에 원후와 같이 돼지 머리를 그린 흰색 가죽을 덧대어 사용하였다.

형태

포를 여러 겹 덧대어 화살이 뚫리지 않도록 제작하였으며, 청색포(靑色布) 바탕에 높이와 너비가 1장 4척이고, 정곡은 사방이 4척 6촌이었다. 좌우에 기둥을 세워 사방을 기둥에 묶어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무과총요(武科總要)』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이중화, 『조선의 궁술』, 조선궁술연구회, 1929.
  • 임선빈·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10, 2000.
  • 최형국, 「조선시대 기사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중앙사론』24,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