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진(濟物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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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의 속진으로 갑곶진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시설.

개설

제물진은 효종 연간에 정비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수군에 의한 방어가 무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연변의 방어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강화도의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물자를 비축하였으며 진무사(鎭撫使)를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제물진을 비롯한 진보(鎭堡)가 설치되고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 병마만호(兵馬萬戶) 5명, 산성별장(山城別將) 1명, 보별장(堡別將) 6명 등이 두어졌다.

위치 및 용도

강화도는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서북 및 서남쪽 해안에서 진입하는 수로와 한강을 통해서 들어오는 수로가 주요 교통로를 이루었다. 육로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오는 경우, 염하(鹽河)로 불리는 물길을 건너야 했고 이로 인해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경로는 갑곶진(甲串津)에서 연미정(燕尾亭)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이 ‘갑곶진’이라는 나루터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것이 제물진이었다.

갑곶진은 강의 폭이 매우 좁아 양천(陽川)→통진(通津)→갑곶(甲串)에 이르는 길목은 육로로 구분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2일). 이곳은 육지에서 강화도로 향하는 주요 길목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내륙을 오가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갑곶진은 도섭이 용이한 장소로 지속적으로 그 방어 문제가 중시되었다. 이로 인해 효종대에는 제물량의 수군만호진을 갑곶진 일대로 옮기고 병마만호로 바꾸었다. 이때 강화도에는 총 53개의 돈대(墩臺)가 연변을 따라 축조되었고, 이 가운데 망해돈·제승돈·염주돈·갑곶돈 등 4개의 돈대가 제물진에 소속되었다. 망해돈은 북쪽으로 월곶진(月串鎭)의 옥창돈(玉倉墩) 1,120보 거리에 있었고, 갑곶돈은 남쪽으로 가리산돈(加里山墩)과 1,400보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네 개의 돈대는 제물진에 속하여 갑곶진 일대를 방어하고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 건국 초, 갑곶진과 통진현 사이의 물길은 제물량(濟物梁)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도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일찍이 수군만호를 두고 병선(兵船)과 무군선(無軍船)을 각각 4척씩 배치하고 510명의 선군(船軍)을 두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세종실록』 지리지 부평도호부 통진현].

17세기 전반, 건주여진의 팽창으로 요동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면서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었다. 인조대에는 강화도의 관방시설 정비가 일부 이루어졌으나, 화량(花梁)·영종(永宗)·초지(草芝)·제물(濟物) 등 4개의 보(堡)를 옮겨 강화도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인조실록』 9년 9월 6일)(『인조실록』 10년 9월 19일). 임진왜란 이후 수군 전력을 과신한 결과 상륙한 적을 방어하는 대책의 마련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결국 병자호란 때 조선 수군은 무력하게 길을 내주었고, 청나라의 군대는 갑곶진을 통해 상륙하여 강화도를 함락하였다(『인조실록』 15년 1월 22일). 이는 강화도를 수군으로 방어하는 전략에 대한 재고가 필요함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649년(인조 27) 3월 강화유수조계원(趙啓遠)은 갑곶진을 수군으로 방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했다(『인조실록』 27년 3월 11일). 이는 적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는 관방 시설을 구축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효종은 즉위 직후 강화도의 관방 시설에 대한 총체적 정비를 추진하였다. 1655년(효종 6) 1월 효종은 강화도의 연변에 보(堡)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대신들에게 하문하였다. 그는 병자호란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해안의 방어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연미정(燕尾亭)부터 덕포(德浦)까지 방어시설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우의정심지원(沈之源)의 건의에 따라 갑곶진에 진(鎭)을 설치하고 강화부의 중군(中軍)이나 천총(千摠)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고 하였다(『효종실록』 6년 1월 17일). 이는 갑곶진에 수군이 아닌 육군을 두자는 의미였다. 이때 갑곶진에는 통진의 제물량 수군 만호진을 옮겨 제물진을 설치하고, 경기 수영이 아닌 강화부에 소속시켜 육군 만호진으로 바꾸었다. 1661년(현종 2)에는 강화유수유심(柳淰)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물진을 뒤로 물려서 다시 설치하였는데, 갑곶진이 진흙 위에 설치된 나루터였기 때문이다[『현종개수실록』 현종 2년 4월 1일 3번째기사]. 이로써 제물진은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강화도 방어체제의 일부로서 특히 갑곶진의 길목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제물진은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머물면서 창고의 쌀을 운반하여 군량으로 사용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는 등 군사기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형태

제물진은 강화부성의 남문으로부터 동쪽으로 10리(약 4㎞) 정도 떨어진 갑곶진 위에 설치되었다. 제물진은 4개의 돈대와 창성(創城)으로 구성되었다. 망해돈의 둘레는 90보로 20개의 성첩(城堞) 즉 성가퀴를 가지고 있었고, 제승돈은 106보에 29개의 성첩, 염주돈은 84보의 둘레에 23개의 성첩, 갑곶돈은 1,013보의 둘레에 40개의 성첩을 가지고 있었다. 창성은 갑창(甲倉)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둘레가 703보였고, 311개의 성첩과 4개의 문이 설치되었다. 정조대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제물진은 서울로 통하는 직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가선(御駕船) 1척, 진선(津船) 6척이 비치되어 통진의 문수산성과 오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박광성, 「병자란 후의 강화도 방비구축」, 『기전문화연구』3, 인천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 1973.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3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5.
  •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도(江都)의 진보설치와 관방체제의 확립」, 『인천학연구』9, 인천학연구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