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태지참주(丁應泰之參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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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명의 찬획주사정응태가 명의 경리양호와 조선을 참소한 사건.

개설

임진왜란 중 정응태는 세 차례에 걸쳐 명에 참소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첫째, 명의 경리(經理)양호(楊鎬)가 울산전투에서 패했으면서도 결과를 허위로 보고하였다. 둘째, 양호가 조선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이는 훗날 조선이 성에 의지하여 명을 배반하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일본과 통교하였다. 정응태의 참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전력의 상당 부분을 명에 의지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발발 전 명은 유구(琉球)의 세자 상녕(尙寧), 일본에 머물고 있던 명인 진신(陳申)과 허의후(許義後) 등을 통하여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쳐 명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때문에 전쟁 초기 명은 조선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명은 벽제관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과의 강화를 통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려고 하였고, 그 결과 강화를 위해서 양호와 심유경을 일본에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화협상이 결렬된 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고, 결국 명 역시 다시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재발하면서 명 조정에서는 전쟁 종결과 관련된 갈등이 있었다. 즉, 명의 병조는 일본과의 강화를 통하여 전쟁을 끝내려 하였지만, 예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전쟁을 통하여 일본을 완전히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정응태의 참소는 전쟁 전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쳐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의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명 내부에서의 강화론자(講和論者)와 주전론자(主戰論者) 간의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발단

정응태는 1598년(선조 31) 군문(軍門)의 찬획주사(贊畫主事)라는 직분으로 조선에 왔다. 조명연합군이 울산전투에서 패배한 후 양호로부터 처벌받은 명의 진인(陳寅)과 주승(周陞) 등은 양호가 물자와 군량 등을 허비하였으며, 명군이 전사하자 민간에서 병력을 채우고 군량과 은을 착복하였다며 정응태에게 참소하였다. 정응태는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양호를 탄핵하는 주문을 명 조정에 올렸다.

조선 조정은 1598년 6월 14일 정응태의 참소 내용을 확인하였다. 즉, 이원익(李元翼)과 김응서(金應瑞)가 패했음에도 양호가 변호하여 다시 벼슬을 하게 되었고, 울산전투의 패배는 양호의 경솔함 때문이여, 양호가 조선 왕에게 자신의 공을 전달하게 하였으며, 양호가 조선의 창부(娼婦)를 끼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선조실록』 31년 6월 14일). 이 중에서도 조선 왕이 양호와 결탁하고 있다는 내용은 조선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명의 지휘(指揮)황응양(黃應陽)을 통하여 정응태의 참주로 양호 대신 다른 사람이 조선에 부임하면 명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1598년 7월 1일 최천건(崔天健)을 명에 파견하여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하였다.

정응태의 두 번째 참소는 양호가 조선을 움직여 성을 쌓았는데 조선은 새로 축성한 성에 의지하여 명을 배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참소가 이루어진 시점은 확실하지 않은데, 조선이 명에 보낸 진주문(陳奏文)에 이에 대한 해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이 양호를 옹호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정응태가 다시 참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던 조선으로서는 주전파(主戰派)인 양호가 계속 조선에 남아 있기를 원하였던 만큼 양호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정응태는 이러한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다시 조선에게 불리한 사항들을 참소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진주사이원익(李元翼)을 명에 파견하였는데, 진주사 일행은 정응태가 세 번째로 참소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 정응태가 올린 주본 내용을 확인한 것은 1598년 9월 21일이었다. 그 내용은 조선이 일본과 함께 명을 침범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 하며, 신숙주(申叔舟)의 『해동기략(海東紀略)』에 조선과 일본의 사신이 친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명의 연호를 작게 표시하여 명보다 일본을 높이며, 조선의 왕이 묘호(廟號)를 사용한다는 것 등이었다(『선조실록』 31년 9월 21일). 세 번째 참소 내용의 상당부분은 조선과 관련된 것이다.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경과

정응태의 참소가 허위임을 밝히기 위하여 조선은 진주사 파견을 결정하였다. 선조는 류성룡(柳成龍)을 명에 파견하려 하였다. 하지만 류성룡은 이를 거절하였고, 그 결과 탄핵당하여 실각하였다. 결국 1598년 10월 21일 정사이항복(李恒福), 부사이정구(李廷龜), 서장관황여일(黃汝一) 등이 명에 파견되었다. 진주사 일행은 1599년 1월 23일 북경(北京)에 도착하였고, 26일 주본(奏本)을 올려 정응태의 무고 사실을 해명하였다. 주본의 내용은 일본에 대해서는 기미책으로 교린 관계를 허락한 것이며, 『해동기략』은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연호의 크기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한 묘호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중국 역대 왕조에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며, 조선은 명을 침략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양호의 유임을 청한 것은 조선이 멸망하고 천하의 대사가 그르칠 것을 염려해서라는 것이었다(『선조실록』 31년 10월 21일).

진주사 파견과 함께 선조는 정무 중단을 선언하여 정응태의 참소 내용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면서 일본과의 강화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정응태의 참소는 무고임이 밝혀졌다. 정응태는 강화파 인물들과 함께 탄핵당하였으며, 조선 왕을 모함한 일로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정억기, 「백사 이항복의 외교 활동」, 『한국인물사연구』 8, 한국인물사연구회, 2007.
  • 허지은, 「정응태의 조선 무고사건을 통해 본 조·명 관계」, 『사학연구』 76, 2004.
  • 鈴木開, 「丁應泰の變と朝鮮-丁酉倭亂期における朝鮮關係の一局面-」, 『朝鮮學報』 21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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