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문과전시(庭試文科殿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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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문과의 2단계 시험이자 최종 단계의 시험.

개설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던 정시에서 초시와 전시를 시행하는 법이 갖추어진 것은 1743년(영조 19)이며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왕이 친림하는 경우에는 초시 없이 1회의 시험으로 당일에 합격자 발표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정시는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할 목적에서 실시된 시험으로 처음에는 정식 과거가 아니었다. 합격자는 전시 또는 회시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정시가 정식 과거의 절차에 의하여 시행하게 된 것은 1532년(중종 27)이었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출석 성적이 좋은 유생에게 전시(殿試)의 예에 의하여 논(論)과 책(策) 두 편을 시험하여 갑과(甲科) 1명, 을과(乙科) 1명, 병과(丙科) 3명을 뽑도록 하였다. 문무를 같이 하여 출신(出身)이 아닌 무사들에게도 과장(科場)을 열었다(『중종실록』 27년 2월 11일).

전시의 예에 따라 시험을 시행하였다 해도 정식 과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여 1534년의 정시에서도 수석 합격자를 비롯한 성적 우수자에게 자급을 올려 주고 차등을 두어 말 1필씩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중종실록』 29년 11월 1일). 『국조문과방목』에 정시 합격자가 처음 오른 것은 1542년(중종 37)이었다. 중종과 명종대에 1번씩 실시되었고 선조 이후에 자주 설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시는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어 응시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기에 많은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1574년(선조 7) 정시의 경우 응시자가 1,500여 명이었다(『선조실록』 7년 5월 2일). 응시자의 급증으로 과장이 혼잡해지고 공정한 운영이 어렵게 되자 해결책으로 숙종 연간부터 초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로 정시에서 초시와 전시를 시행하는 법이 갖추어진 것은 1743년(영조 19)이었다. 전시는 전정(殿庭)에서 실시하고, 답안지에 사조(四祖)를 모두 쓰고 봉미한 후 역서(易書)하게 하였다(『영조실록』 19년 1월 25일).

정시문과는 『속대전』에서 법제화되는데 전시의 시관으로는 독권관인 의정(議政) 1명, 종2품 이상 2명과 대독관인 정3품관 이하 3명을 파견하여 시험을 관리하게 하고 감찰 1명이 시험을 감독하였다. 왕이 친림하는 경우에는 알성시와 같이 초시 없이 1회의 시험으로 당일에 방방하였다. 합격 인원은 왕의 품지에 따라 정하였다. 시험 과목은 대책(對策)·표(表)·전(箋)·잠(箴)·송(頌)·제(制)·조(詔)·논(論)·부(賦)·명(銘) 중에 1편이었다. 실제로 표와 부가 많이 출제되었다.

정시는 경과(慶科)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대로 갈수록 거의 매년 설행될 정도로 자주 설행되었다. 1766년(영조 42)의 경우는 1년에 4번의 정시가 설행되었다. 또 정시는 중시(重試)의 대거로 시행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1년 11월 16일).

1844년(헌종 19)부터는 정시초시가 지방에서도 설행되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초시를 서울과 지방에서 나누어 설행할 때 지방에서는 각 도 관찰사가 시험을 관할하였다.

변천

처음에는 학문을 권장할 목적에서 실시되었던 정시가 정식 과거의 절차에 의하여 시행하게 된 것은 1532년(중종 27)이었다. 당초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였으나 1743년(영조 19) 초시와 전시를 시행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이 내용이『속대전』에 수록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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