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국(典圜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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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말에 운영된 근대적 상설 조폐 기관.

개설

전환국 설치 이후에도 중앙 관서와 지방 관청에서 화폐 주조 사업이 진행되고 있기는 했으나 전환국은 조선말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국내 유일의 상설 조폐 기관으로서 화폐 주조 사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 이후 조선의 화폐가 일본의 오사카조폐국에서 주조되면서 조선의 전환국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부가 재정 부족으로 인해 임시로 설치한 주전소(鑄錢所)에서는 다량의 화폐를 계속 주조할 수 없어 주전 사업을 항상 할 수 있는 1개의 국(局)을 별도로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독립적 상설 기관인 전환국이었다. 1884년 2월 17일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 Möllendorff, Paul George von)를 전환국 총판에 임명하고(『고종실록』 21년 2월 17일), 그의 건의로 신식 화폐 주조를 서둘러 방판, 위원, 사사 등을 각 1명씩 증원하였다.

전환국 설치는 1883년 7월 5일 결정된 것이었고, 8월 7일 고종은 전환국 설치를 명하는 동시에 통리군국사무아문에게 설치장정 작성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일이 걸려 1885년 2월 종로 원동(현 원서동)선혜청 별창 자리에 청사를 기공하고 그해 11월 준공하였다. 이것이 경성전환국이다. 경성전환국은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동은 기관실, 제2동은 지금실(地金室)·조각소·칭량소(稱量所), 제3동은 용해·신연(伸延)·극인(極印)·분석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성전환국이 유명무실해지면서 1888년 경성전환국 폐지론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당오전(當五錢)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양에 분소를 설치하고 당오전과 1문전(文錢)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였다.

조직 및 역할

경성전환국은 1892년 인천으로 이전하였다. 그 이유를 운수 교통 불편으로 돌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인 주관으로 건립되는 전환국 설치 장소로는 인천이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인천전환국은 1892년 5월 약 6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하여 같은 해 11월 준공되었고, 12월 4일에 시운전을 거행하였다. 일본 측 입장에서 전환국을 개편하려는 오미와 초베에[大三輪長兵衛] 등이 요구한 건물·기계·자금의 양도를 거절한 조선 정부는 1893년 1월 16일 인천전환국의 조폐 사업 중지를 결정하였다. 이후 전환국 사업은 지지부진하였고, 1894년 청일전쟁으로 사업도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공사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관제 개혁안에 따라 전환국은 탁지아문 소속의 1개 국으로 배치되었다. 이어 일본은 전환국 관리와 사업에 다시 참여하는 한편 신식 화폐 발행장정 시행을 강요하여 자국의 신화폐를 모방케 하는 동시에 일본 화폐의 조선 진출을 합법화했다. 이후부터는 조폐 사업을 전적으로 담당하여 인천전환국에서 5냥·1냥짜리 은화, 2전5푼짜리 백동화, 5푼짜리 적동화, 1푼짜리 황동화 등 5종의 근대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발행·유통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이 들어서자 1898년 9월 25일 한국 정부는 자금과 기술력을 가진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와 용산전환국 건립 계약을 맺고 10월 20일 준공하였다. 이때 한국 측 총감독은 이용익이었고 공사 담당은 최석조(崔錫肇)였다. 전환국은 그해 11월 10일 다시 공사에 착수하여 1900년 5월 2일 완공되어 시운전을 하였고 9월 10일부터 백동화 주조를 개시하였다. 그사이 1900년 7월 18일 탁지부 소속 1등국이었던 전환국은 관제 개혁으로 독립 기관이 되었다. 총책임자도 국장에서 관리로 바뀌었다.

1901년 2월 16일 관제 개정으로 전환국은 탁지부 소속 1개국으로 다시 환속되었고 이용익을 탁지부 협판으로 임명하였다. 1902년 2월 20일 관제를 다시 개정하여 전환국은 탁지부에서 분리하여 독립 기관이 되었고 이용익이 전환국관리 서리에 임명된 이후 용산전환국은 독립 기관으로 존속하였다.

1892년부터 1904년까지 인천전환국과 용산전환국에서 주조한 화폐 총액은 1896만 658원으로 그중 백동화는 총 주조액의 88%를 차지하는 1674만 3522원이었다. 그러나 백동화 남발로 인해 대한제국의 화폐 가치와 신용은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안정되었던 외국 화폐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로 인해 일본 은행권과 보조 화폐는 다량으로 한국에 유입되었다. 1903년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던 일본 화폐는 보조 은화까지 합하면 160만 원에 가까운 거액으로, 제일은행권까지 합하면 약 170만 원으로 추산된다.

변천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9일 전환국관리이용익을 일본으로 잡아가고 최석조를 국장에 임명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던 일본은 8월 11일 대한제국 정부의 화폐권을 완전히 쟁취하기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단행하였다. 이는 당시 유일한 조폐 기관인 전환국을 폐지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먼저 백동화를 발행하던 전환국의 문제점을 과장 강조하면서 이를 폐지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9월 20일 한국에 들어온 탁지부 재정고문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전환국 문부를 조사하였고, 9월 25일 주한일본공사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권유로 전환국의 조폐 사업은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메가타는 10월 21일 인쇄소만 남기고 주조부와 제조부를 폐지하여 전환국은 설립 22년 만에 완전 폐지되었다(『고종실록』 41년 11월 28일). 전환국 폐지 이후 한국 화폐의 주조는 오사카조폐국에 위촉되었고 주요 시설도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오사카조폐국에서 주조한 한국 화폐는 총 1142만 3538환이었고, 총 9개 종의 화폐를 발행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원유한, 「‘전환국(典圜局)’고(攷)」, 『역사학보』37, 1968.
  • 원유한, 「당오전고(當五錢攷)」, 『역사학보』35·3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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