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방패(長防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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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병기 중의 하나로 태종 때 만들어진 장방형의 방패.

개설

조선은 개국 초기에는 사순(司楯) 등이 다양한 방패를 만들어 군사 업무에 종사하였는데, 태종 때 일정한 규격의 삼군(三軍) 방패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방패는 칼이나 창을 막는 수비기구로서 장방형인 장방패(長防牌)와 둥근 모양의 원방패(圓防牌)가 있었다. 장방패는 길이 5척 6촌, 너비 2척 2촌이다. 뒷면은 무명으로 바르고, 가운데에 손잡이가 있으며, 앞면은 쇠가죽으로 싸고 그 위에 오색으로 물결과 짐승 얼굴을 그려 놓았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에 북방의 여진족들은 산악 지역에서 대열을 짓지 않고 숲과 돌 틈에 숨거나 혹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공격했기 때문에, 대열을 갖추고 대부대로 이동하는 조선군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싸워야 했다. 조선은 1407년(태종 7)에 처음으로 방패를 만들어서 여진족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태종실록』 7년 9월 5일).

정도전(鄭道傳)은 『진법(陣法)』에서 칼과 방패로 무장한 병사의 장점[刀楯之利]을 이야기하며, 높은 언덕과 좁은 길에 장애물이 많이 있으면 이곳은 칼과 방패를 사용하는 곳이며, 이런 장소에서는 궁노(弓弩) 2명이 도순(刀楯) 1명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1410년(태종 10)에는 팽배수와 창수들에게 각각 목검과 목창을 들고 교전하도록 하였는데, 다음 날 창수 2명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태종실록』10년 3월 11일). 이로 보건대, 조선초기의 방패수는 단병접전에서 상당히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방패로 무장한 별도의 시위부대가 편성되기도 하였다. 1415년(태종 15)에는 “장실한 자 1천 명을 뽑아 방패를 주어 돌아가면서 시위케 하면 좋은 제도가 될 것”이라는 제안에 따라서 ‘방패’라고 하는 별도의 부대를 구성하였고(『태종실록』 15년 6월 17일), 세종 때는 그 인원이 7,500명에 달하였다(『세종실록』 30년 3월 9일).

조선후기의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조선전기의 장방패와 유사한 직사각형의 방패를 장패(長牌)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융원필비』의 장패는 길이가 6척 9촌(138cm)이고, 윗면의 너비가 2척 1촌 5분(49.15cm), 아랫면의 너비가 1척 8촌 5분(38.85cm)이다. 이 방패는 “진을 칠 때 각 대(隊) 앞에 2개의 장패를 세워 이로써 한 대의 병졸들을 엄폐시키고 시석(矢石)을 막는다”고 했으니, 조선전기의 장방패와 용도가 같다고 하겠다.

궁중유물전시관에는 현재 『융원필비』 장방패와 형태는 유사하지만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각방패가 있다. 또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에는 위아래가 뾰족하고 길이가 짧은 사각방패 한 점이 그려져 있다.

형태

당시 제작된 방패는 직사각형 모양의 장방패와 둥근 원방패 두 종류였다. 장방패의 길이는 5척 6촌이고, 너비는 2척 2촌이다. 소나무 널빤지를 안쪽으로 오목하게 깎아 표면에는 가죽을 씌우고, 안쪽에는 천을 씌웠다. 방패의 표면에는 부대별로 색을 달리하여 중군(中軍)은 적색, 좌군(左軍)은 청색, 우군(右軍)은 백색으로 나두(螺頭), 즉 괴수머리를 그렸다. 방패 가운데에는 구리거울을 장치하여 번쩍거리며 위용을 나타내게 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군례 서례 병기 간].

장방패는 무겁고 길기 때문에, 서양의 파비스처럼 땅에 세워 놓아 적의 화살을 막는 데 사용하여 입방패(立防牌)라고도 불렸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융원필비(戎垣必備)』
  • 『진법(陣法)』
  •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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