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부(長湍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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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단부 |
한글표제 | 장단부 |
한자표제 | 長湍府 |
상위어 | 경기(京畿) |
동의어 | 습천(隰川), 장천성(長淺城), 야야(耶耶), 야아(夜牙), 단주(湍州), 장임(長臨), 임단(臨湍) |
관련어 | 장단현령(長湍縣令), 장임현(長臨縣), 임단현(臨湍縣), 도원역(桃源驛), 정희왕후(貞熹王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세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단부(長湍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4년 6월 25일, 『세조실록』 5년 8월 18일 |
조선시대에 장단부를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장단부(長湍府)는 고려 때인 1001년(고려 목종 4)에 단주(湍州)라는 이름으로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이 되어 현령(縣令)이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과 세조 때 임강현(臨江縣)이나 임진현(臨津縣) 등과 합쳐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469년(예종 1)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개성부 장단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단부는 고려시대에 주(州)나 현(縣)이 되어 그 지역을 관할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종 때에는 현으로, 세조 때에는 군으로 기능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비로소 거진(巨鎭)이 설치되고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이때 개성부에 소속되었던 강화(江華), 풍덕(豐德), 삭녕(朔寧), 마전(麻田), 연천(漣川), 교동(喬桐)을 장단에 이속시켜 장단부는 1도호부 3군 2현을 관할하는 지방행정기구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장단부에는 종3품의 부사(府使)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있었다. 교수는 지방 향교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부와 목에 두었으나, 무록관(無祿官)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자치규약인 향약 등이 활발하게 운영되어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종2품의 부사 아래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 9명, 아전 54명이 있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府)에는 대개 4~5명을 두었는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장단부는 고려 1001년(고려 목종 4)에 시중한언공(韓彦恭)의 고향이라 하여 단주로 승격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다시 현으로 만들고, 현령을 두어서 상서도독(尙書都督)의 소관으로 하다가, 1062년(고려 문종 16)에 개성부에 소속시켰다. 1414년(태종 14) 9월에 장단현과 임강현을 합쳐 장임현(長臨縣)이라 하였다가, 12월에 다시 장단현과 임진현 두 현을 합쳐 임단현(臨湍縣)으로 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에 다시 장단현이 되었다. 장단현이 매우 작아 임진현과 합쳤는데, 이때 다시 복구된 것이다.
1456년(세조 2)에 장단현과 임강현을 임진현에 합치고 임진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1458년(세조 4)에 장단·임진·임강의 3현을 합쳐 임진현이라 불렀는데, 장단은 당시 중전이었던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조부 이상 5대 조의 장지(葬地)가 있어서 장단현이라 부르고 현령을 임명하게 되었다(『세조실록』 4년 6월 25일). 1459년(세조 5)에 합친 세 고을의 민호(民戶)가 1,022호에 이르러 군으로 승격시켰다(『세조실록』 5년 8월 18일). 1460년(세조 6)에 관노비와 인리(人吏) 등이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어 치소를 세 고을의 중앙에 있는 도원역(桃源驛)으로 옮기고, 역(驛)은 온신리로 옮겼다. 1469년(예종 1)에 강화, 풍덕, 삭녕, 마전, 연천, 교동을 장단에 이속시켜서 도호부로 삼았다. 1840년(헌종 6)에 장단부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49년(헌종 15)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개성부 장단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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