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印地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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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세조 13)에 세조가 고안하여 제작한 지리 측량 기구.

개설

인지의(印地儀)의 용도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수(數)는 하늘이 땅으로 들어가는 이치와 복서(卜筮)의 학문이 길흉의 소장(消長)을 미리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산을 찾고 강물을 구하여 표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인지의를 만들었다(『세조실록』 13년 3월 15일).”고 서술되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인지의는 풍수와 관련하여 지세와 방향을 측정하는 도구로 추정된다.

연원 및 변천

1467년 세조가 고안하여 제작하여 신하들에게 보이고 토론하였으며(『세조실록』 13년 3월 14일)(『세조실록』 13년 3월 15일), 1467년(세조 13)에는 영릉에 가지고 가서 시험적으로 측량을 해보게 하였다(『세조실록』 13년 3월 18일).

형태

인지의의 구조와 사용 방법은 『세조실록』에 약간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중극(中極)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24방위(方位)를 조준하고, 네 방위[四方]는 사극(四極)에 바르게 분포(分布)되어 있다. 척촌(尺寸)에 따라 바로잡고 교도(交度)를 알아내며, 절변(節變)과 원근(遠近)을 따라 그림판에서 측량하되 좌우로 회전하여 서로 맞추고 상하로 서로 이으니, 크고 작은 것이 빠트리지 않고 능히 일을 완수할 있다.”고 하였다(『세조실록』 13년 3월 15일).

또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이육(李陸)이 인지의의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구리를 부어서 기계를 만들되, 주위에 24방위를 배열하였으며, 그 속은 비워 놓고 구리 기둥을 세웠다. 구멍이 뚫린 동(銅)으로 만든 막대기인 형(衡)을 그 위에 가로질러 놓고, 이것을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그 구멍으로 들여다보며 관측하는데, 이것을 규형(窺衡)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지의는 현존하지도 않고 그 밖의 기록이 전하지 않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태일(太一) 신앙과 관련하여 태일이 거처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 인지의를 사용하자는 건의도 있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전 대구부사(大丘府使)최호원(崔灝元)이 “태일은 인간의 오복(五福)의 일을 모두 맡아보고, 세상을 어루만져 함께 변화시키니, 제사 지내는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태일은 해마다 태궁(太宮) 즉 방향을 옮겨 다니니 그 방위를 미리 계산하여 그에 맞는 방위에 사당을 설치해야 하므로, “구궁(九宮) 방향에 맞는 도(道)를 인지의로 미리 먼저 추정(推定)하여, 아무 궁(宮)은 아무 고을의 아무 산이라고 명확하게 문헌 장부를 만들고, 돌에 새겨 표(標)를 세워 땔나무와 불을 금하고, 미리 산천의 기운을 길러서, 수목이 울창하고 맑게 하면, 다른 때에 태일신을 모실 장소가 될 수 있어,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여 잘못되고 어긋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다(『성종실록』 8년 윤2월 18일). 이러한 왕실의 도교 신앙은 조선전기에 잠시 중시되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