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李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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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3년(선조 36)∼1655년(효종 6) = 53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사간원 헌납(獻納)이고, 관작(官爵)은 정사(靖社)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이며,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이다. 자(字)는 여근(汝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이후재(李厚載)이고, 어머니 풍양조씨(豊壤趙氏)는 호조 좌랑조수륜(趙守倫)의 딸이다.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제 5왕자)의 8대손이고, 우의정이후원(李厚源)의 조카이며, 영의정이유(李濡)의 조부다.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사옹원 주부(主簿)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 의금부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48세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효종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팔순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인조 시대 활동

사람됨이 숙성(夙成)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623년(인조 1) 3월,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반정>에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녹훈(錄勳)하였는데, 그는 나이가 어려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봉되고,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비문] 그 후에 학문을 닦아서,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음서(蔭敍)로 사옹원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의금부 도사(都事)로 전임되었다.

1636년(인조 14) 9월, 전라도 동복 현감(同福縣監)로 나갔는데,[『승정원일기』인조 14년 9월 24일]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10만 명의 오랑캐 8기병(旗兵)을 이끌고 갑자기 쳐들어와 사흘 만에 그 선봉대가 서울 근교에 진입하였다.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가려고 하였으나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히면서, 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고을의 군민(軍民)을 징발하여, 전주 감영(監營)으로 간 동복 현감이형은 동복현의 군사를 전라도 병마사(兵馬使)에게 교부(交付)하고 돌아왔다. 당시 근왕(勤王)하러 서울로 가던 여러 지방의 군사들이 곳곳에서 오랑캐 군사들에게 패배하면서 흩어졌는데, 동복 고을의 군사들이 도망쳐오자, 현감이형은 군사들을 다시 불러 모아 엄하게 단속(團束)한 후, 이들을 이끌고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 이르렀다. 밤중에 오랑캐가 쳐들어왔다고 군중(軍中)이 소란해지면서, 고을의 아전들과 군관들이 모두 산 위로 도망쳤으나, 현감이형은 혼자 옷을 벗은 채 막사 안에서 꿈쩍하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도망쳤던 사람들이 이튿날 돌아와서 그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모두 부끄러워하였다. 전라도 감사가 그 말을 듣고, 고과(考課)에서 최상등으로 평가하면서, 동복 현감에 연임되었다.[비문]

1642년(인조 20) 조정으로 돌아와 공조 좌랑(工曹左郞)이 되었고,[『승정원일기』인조 20년 11월 2일] 이어 예조 좌랑(禮曹左郞)에 임명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훈부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은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648년(인조 26) 다시 충훈부 도사가 되었으나,[『승정원일기』인조 26년 1월 7일]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으므로, 청요직(淸要職)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1649년(인조 27) 2월에 충청도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승정원일기』인조 27년 2월 7일] 아버지가 늙었다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은 “이것이 아마 옛사람이 말한 ‘부모의 하루 봉양을 삼공(三公)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칭찬하였다.[비문]

효종 시대 활동

1549년 5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김포 군수(金浦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병을 구완한다는 핑계로 부임하지 않고 집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지 20년이 지난 1650년(효종 1)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처음에 성균관 사예(司藝)에 보임되었다가, 1651년(효종 2)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추천으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효종실록』 3년 2월 23일),(『효종실록』 3년 3월 17일),(『효종실록』 3년 4월 16일) 이형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으로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소신을 지키고 한결같이 쟁론(爭論)하였다.

1652년(효종3) 대간에서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의 아들 김식(金鉽)의 역모(逆謀) 사건을 국문(鞠問)할 때, 사헌부 장령이었던 이형은 대사헌심지원(沈之源)과 함께 “이해창(李海昌)과 엄정구(嚴鼎耉)는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을 이조 낭관으로 천거하고 이끌어 주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출송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간원 정언(正言)조사기(趙嗣基)와 오정원(吳挺垣)은 이해창·엄정구의 무죄를 주장하며 쟁론하였다. 배천 현감(白川縣監)이해창과 좌승지엄정구는 모두 김자점의 문객(門客)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이조에서 관리를 천거할 때, 김식(金鉽)을 이조 정랑으로 천거하였는데, 이해창이 실질적으로 이를 주도하였다. 이조 당상관 조경(趙絅)이 이를 반대하자, 엄정구는 조경을 은근히 설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서 이해창과 엄정구 두 사람은 결국 김자점에게 아첨하고 역적 김식을 잘못 천거한 죄로 모두 관작을 삭탈당하고 도성문 밖으로 출송되었다.

1653년(효종 3) 1월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그해 4월에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홀로 남은 8순의 아버지가 아들 이형을 항상 보고 싶어 하다가 결국 병이 들었다. 1654년(효종 5) 1월 영의정김육(金堉)은 경연(經筵)에서 효종에게 “경성 판관이형의 아비가 등창이 발생하여 조석 간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정상이 가련합니다.”하고 아뢰자, 효종은 “이형에게 벌을 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신의 말도 이와 같으니,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병든 아비를 보살피게 하라.” 고 허락하였다.(『효종실록』 5년 1월 7일),[『잠곡집』 연보]

이때 영의정잠곡(潛谷)김육(金堉)과 형조 판서창주(滄州)김익희(金益熙)가 독자인 이형이 서울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며 가끔 조정에 벼슬할 수 있도록 서로 번갈아가며 효종에게 호소하였으므로, 그가 경성판관에서 체직되어 돌아 올 수 있었다.[비문] 그러나 추운 변방에서 풍토병을 얻은 그는 아버지보다 몸이 더욱 쇠약해져 있었다. 1654년(효종 5) 12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1655년(효종 6) 2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그해 4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서, 다시 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6년 4월 17일 1번째기사] 그해 겨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비문] 이형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이후재는 나이가 80세에 가까웠으며, 그 뒤에도 오래도록 살다가, 90세가 가까워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인효(仁孝)하고 화순(和順)하며 기개가 있었다. 친족에게 순후(淳厚)하고 친구들에게 선량(善良)하였기 때문에 그의 집은 항상 훈풍(薰風)이 부는 듯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창화(唱和)하느라 종일 떠나지 못하였다. 그는 인망(人望)도 얻고 임금의 지우(知遇)도 받아 벼슬길이 열리기 시작할 무렵에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그의 원대(遠大)한 포부를 모두 다 펴보지 못하였다.[비문]

1653년(효종 4) 그가 사헌부 장령이었을 때, 효종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쫓겨났는데, 함경도 경성(鏡城)은 서울에서 1천 7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변경 지역에 부임할 수 없었던 이형은 임지로 떠나면서 “나는 과감하게 임금에게 직언(直言)하였으나, 간쟁(諫爭)한 것에 대한 실제 결과는 없고, 늙은 아버지를 두고 멀리 떠나는 불효한 행실만 남았으니, 나는 충(忠)과 효(孝)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며 탄식하였다.[비문] 그러나 홀로 남은 8순의 아버지는 항상 아들 이형을 보고 싶어 하다가 병이 들었다. 1654년(효종 5) 1월 경연(經筵)에서 영의정김육(金堉)이 효종에게 “경성 판관이형의 아비가 등창이 발생하여 조석 간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 정상이 가련합니다.”하고 아뢰었다. 또한 영의정잠곡(潛谷)김육(金堉)과 형조 판서창주(滄州)김익희(金益熙)가 함께 효종에게 “이형은 독자(獨子)인데,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게 되면서, 늙은 아버지가 아들 생각에 병이 났습니다.” 하며 서로 번갈아 가며 호소하였다. 늙은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 효종은 “이형에게 벌을 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신의 말도 이와 같으니,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병든 아비를 보살피게 하라.” 고 하면서,(『효종실록』 5년 1월 7일),[『잠곡집』 연보] 특별히 이형의 체직(遞職)을 허락하였으므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성덕(聖德)을 추앙(推仰)하였고, 또 두 대신에 대해서 “어진 두 분의 정승과 판서가 아니었다면 누가 임금의 이러한 효리(孝理)를 일깨워 드릴 수가 있었겠는가.” 하고 칭찬하였다. 또한 “이형 부자의 자정(慈情)과 효성(孝誠)이 독실하지 않았다면, 또 어찌 임금을 감동시킬 수가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형은 경성(鏡城)에서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 이후재(李厚載)를 돌볼 수 있었으나, 풍토병을 얻어 결국 2년 뒤인 1655년(효종 6)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3세였다. 그때 그의 아버지 이후재(李厚載)는 나이가 80세에 가까웠는데, 아들 이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두 부자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였다.[비문]

이형의 막내아들 이우휘(李遇輝)는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의 제자인데, 자(字)는 군회(君晦)이고, 호(號)는 청계당(聽溪堂)이다.[『동춘당집 속집』 12권-문인록] 유명한 유학자인 이우휘는 그의 문하에서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 등을 길러냈는데, 이의현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문장가이다. 1670년(현종 11) 송준길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충청도 회덕(懷德)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제자 이우휘의 안내를 받아 그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형의 아들 7형제가 화목한 것을 보고, 『시경(詩經)』「소완(小宛)」편에 난세(亂世)를 만나서 조상을 기리며 화(禍)를 면하기 위해 형제가 서로 돕고 오순도순 살아가며 읊은 시를 읽도록 권하였다.

이때 송준길은 “우재(迂齋)이후원(李厚源)이 나를 매우 사랑하여 항상 동생처럼 대하였으므로, 내가 이후원의 큰형인 중추부 첨지사(簽知事)이후재(李厚載) 어른을 찾아뵙고, 또 그의 아들 사헌부 장령(掌令)이형(李逈)과도 교유하게 되었다. 첨지사이후재 어른은 참으로 공자(孔子)가 말씀한 ‘선인(善人)’으로서 쇠퇴한 말세(末世)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분이었으므로, 내가 항상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령이형이 일찍 죽고, 우의정이후원도 그 뒤에 바로 돌아갔으나, 첨지사이후재 어른만은 홀로 장수(長壽)를 누려서, 거의 구순(九旬)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몇 해 뒤에 나의 셋째 손자 송병원(宋炳遠)이 장령이형(李逈)의 막내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령이형은 자손이 번성할 뿐만 아니라 벼슬아치 후손들이 온 집안에 가득하니, 선인(善人)은 죽더라고 그 자손이 복을 받는 이치를 알 수 있다. 1670년(현종 11) 봄에 내가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올라오자, 그 막내아들 군회(君晦)이우휘(李遇輝)가 나를 특별히 후대(厚待)하여,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거처하게 하였다. 그 집은 바로 예전에 첨지사이후재 어른이 거처하던 곳인데, 작은 행랑의 회랑(回廊)에 있는 연꽃 분재(盆栽)와 섬돌 밑의 국화는 지난날과 다름이 없다. 이제 첨지사이후재·장령이형 부자와 우재이후원을 모두 만나볼 수 없게 되었으니, 내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슬퍼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리고 『시경(詩經)』의 「소완(小宛)」편의 시(詩)를 열심히 읽어보도록 권면하는 뜻에서 이 글을 써서, 이우휘의 여러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글을 지어주었다.[『동춘당집』 16권 잡저]

이 글을 보면, 이형(李逈)이 갑자기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7형제가 구순(九旬)의 할아버지 이후재를 모시고 살며, 서로 독려하여 모두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생원(生員) 윤흥파(尹興坡)의 딸인데, 자녀는 6남 3녀를 낳았고, 둘째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현령(縣令)이경하(李擎厦)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중휘(李重輝)는 생원으로서 군수(郡守)를 지냈고, 차남 이영휘(李永輝)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승지(承旨)를 지냈으며, 3남 이익휘(李益輝)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4남 이시휘(李時輝)는 진사(進士)로서 동부(東部)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5남 이정휘(李廷輝)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6남 이만휘(李晩輝)는 무과에 급제하여 회령부사(會寧府使)·병마사(兵馬使)를 지냈으며, 7남 이우휘(李遇輝)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장녀는 군수이파(李坡)의 처이고, 차녀는 오천군(鰲川君)이세장(李世章)의 처이며, 3녀는 찰방(察訪)임세온(林世溫)의 처이고, 4녀는 별검(別檢)송병원(宋炳遠: 송준길의 손자)의 처이다. 서자 이성휘(李成輝)는 무감(武監)을 지냈다.[비문]

손자 이유(李濡: 장남의 아들)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손자 이담(李湛: 장남의 아들) 역시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임천 군수(林川郡守)를 지냈는데, 유명한 유학자이다. 손서(孫壻) 좌의정권상하(權尙夏)는 장남의 사위이고, 손서(孫壻) 예조 참판이택(李澤)과 손서(孫壻) 대사성(大司成)이제(李濟)는 차남의 사위이다.[비문]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춘당집(同春堂集)』
  • 『금역당집(琴易堂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미호집(渼湖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