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술(李時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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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 39)∼1671년(현종 12) = 66세]. 조선 후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이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사강(士强)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성남(城南)이다. 아버지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지낸 이정남(李井男)이며, 어머니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병조 참의(參議) 윤의(尹)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참찬(參贊)이몽량(李夢亮)이다. 이정구(李廷龜)의 손녀사위이자, 예조 참의홍주국(洪柱國)의 자형이기도 하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교우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 이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고, 공조 좌랑(佐郞)을 거쳐 신창현감(新昌縣監)에 임명 되었다. 1648년(인조 26)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마친 후 형조 정랑(正郞)과 공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증광(增廣)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7세였다. 이때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를 마친 후 성균관 직강(直講)에 보임되었다. 1655년(효종 6)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6월 6월 16일 1번째기사],(『효종실록』 6년 7월 15일) 1656년(효종 7)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전임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효종실록』 7년 1월 26일),(『효종실록』 7년 12월 4일),(『효종실록』 7년 12월 26일) 1657년(효종 8)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과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효종실록』 8년 9월 5일),(『효종실록』 8년 11월 30일),(『효종실록』 8년 12월 21일) 1658년(효종 9)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가 1659년 (효종 10)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효종실록』 9년 9월 18일),(『효종실록』 10년 1월 21일)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사은사(謝恩使)홍득기(洪得箕)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현종실록』 즉위년 11월 15일) 1660년(현종 1)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다.[『현종실록』 1년 4월 29이 1번째기사],(『현종실록』 1년 5월 15일) 그런데 1662년(현종 3) 의주(義州)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서 벌목한 일이 청나라에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신은 그 책임자인 의주부윤이시술을 교형(絞刑)에 처할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였다.(『현종실록』 3년 5월 11일),(『현종실록』 3년 5월 16일) 조정에서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형조 판서(判書)허적(許積)으로 하여금 청나라 사신과 담판을 하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정태화(鄭太和)와 허적을 진하사(進賀使)로 삼아 북경(北京)으로 파견하였는데, 다행히 이시술을 의주부윤에서 교체시키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현종실록』 3년 5월 19일),『현종실록』 3년 5월 22일 1번째기사],(『현종실록』 3년 5월 23일),(『현종실록』 3년 5월 25일),(『현종실록』 3년 11월 20일)

1665년(현종 6)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 6년 2월 11일),(『현종실록』 6년 6월 7일),(『현종실록』 6년 9월 4일),(『현종실록』 6년 11월 4일) 1666년(현종 7) 이조 참의가 되었고, 이후 사간원 대사간과 이조 참의를 번갈아 역임하였다.(『현종실록』 7년 9월 21일) 1669년(현종 10) 병조 참판(參判)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이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다.(『현종실록』 10년 2월 28일),[『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1번쨎기사] 1671년(현종 12) 병으로 성남(城南)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시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온화하고 겸손하였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고상하였다. 행동은 도탑고 성실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교만하거나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1662년(현종 3) 의주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서 벌목한 일이 청나라에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은 의주부윤이시술을 서울로 압송하여 직접 사문하였는데, 그 결과 이시술의 죄가 교형에 해당한다며 조선 정부에 그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청나라의 횡포와 국가의 무능함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시술의 친구인 송준길은 “변경의 일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들을 국가가 살려 낼 수 없다면 어느 누가 지성으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라며 그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동춘당집(同春堂集)』]

현종은 영의정정태화를 비롯한 비국(備局)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하는 한편, 대청(對淸) 문제에 정통한 병조 판서허적으로 하여금 청나라 사신과 담판을 하도록 하였다. 청사를 만난 허적은 “이시술의 죄는 청나라에서는 사형에 해당하겠지만, 조선에서는 추고에 해당합니다. 만약 칙사(勅使)가 이시술을 죽이고 돌아간다면 황제가 ‘조선에서는 이시술이 어떤 법의 적용을 받는가.’ 하고 물을 터인데, 칙사가 ‘추고에 해당됩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이 보고를 받은 어진 황제가 반드시 이를 두려워하며 불쌍하게 여길 것입니다. 나는 이시술이 원통하게 죽고, 칙사가 견책을 받는 일은 하늘의 재앙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칙사가 이시술을 죽이고 귀환한다면, 나는 사신이 되어 북경에 가서 황제에게 아뢸 것입니다. 만약 칙사가 청나라의 법을 적용시켜 이시술을 죽이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의 법을 적용하여 살려준다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였다. 칙사가 한참을 숙고하더니, 결국 웃으면서 파하였다고 한다.[『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 이후 허적은 실제로 사문하는 일을 주선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차임되기를 자원하였고, 조정에서는 영의정정태화를 진하사로, 허적을 부사로 삼아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비록 청나라 칙사가 의주부윤이시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으나, 나중에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처럼 하면서 그 죄를 완화시켜 주었던 이전의 경우에 비추어, 조선 정부는 이것이 명분을 내세워 뇌물을 요구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정부는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금 2천 냥과 은 3천 냥, 초피(貂皮) 2백 령(令)등 많은 물건을 지불하였다. 당시 이시술의 아들 이세장(李世長)도 그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하여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애를 썼는데, 친구들까지도 재화를 써서 앙화(殃禍)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앞 다투어 금은과 비단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뇌물로 쓴 돈의 액수가 너무 많아서 집을 팔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다 갚지 못할 정도였다. 이 소문을 들은 조선 정부에서는 결국 이세장에게 금 500냥을 지급해주었다. 이 사건은 다행히 이시술을 의주부윤에서 교체 시키는 선에서 해결 되었다.

당시 이시술은 “사생(死生)은 하늘이 정하는 바에 따를 뿐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라며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일이 해결된 후 그는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원해 준 허적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였다. 그러나 남인(南人)의 영수인 허적이 1664년(현종 5)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서 영의정까지 오르자 그의 정치적 입지를 불안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틈틈이 자식들에게 경조사 이외에는 허적과 왕래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과연 1680년(숙종 6) 허적은 서인(西人)의 정치 보복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포천현(抱川縣) 계유리(溪流里)에 있고,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예조 참판홍영(洪霙)의 둘째 딸로서 이정구(李廷龜)의 손녀이며,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세장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냈고, 차남 이세필(李世弼)은 군수를 지냈으며, 3남 이세희(李世熙)는 일찍 죽었다. 장녀는 이상렴(李尙濂)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부제학(副堤學)윤진(尹搢)의 처가 되었으며,3녀는 시직(侍直)이만휘(李萬徽)의 처가 되었고,4녀는 현령(縣令)홍원보(洪遠普)의 처가 되었다. 측실(側室)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이세춘(李世春)이다. 장녀는 조필달(曹必達)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무과에 급제한 황엽(黃鈢)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남계집(南溪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농암집(農巖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성잡기(靑城雜記)』
  • 『월사집(月沙集)』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백사집(白沙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택당집(澤堂集)』
  • 『백헌집(白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