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발(李時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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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 5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양구(養久)이고,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대건(李大建)이며,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도(金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진사 이경윤(李憬胤)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발(李渤)이다. 박팽년(朴彭年)의 사위 이공린(李公麟)의 아들 8형제, 이른바 ‘경주이씨 8별(鼈 : 자라)’ 가운데 한 사람인 이원(李黿)의 현손이자, 좌의정이경억(李慶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며, 정경세(鄭經世)와 가깝게 지냈고,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정엽(鄭曄)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그해 4월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방목(榜目)』] 그해 6월 중국어를 자주 사용하는 승문원(承文院)에 분속되었다가, 스스로 중국어가 미흡하다고 여겨 그해 9월 사직하고 고향 청주로 돌아와서 혼자 중국어를 학습하는 한편, 스승 이덕윤을 찾아가서 역학(易學)을 더욱 깊이 공부하였다. 1590년(선조 23) 다시 상경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1591년(선조 24) 봄 승정원(承政院) 가(假)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고,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근친(覲親)하러 고향 청주에 갔다가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서 청주에서 의병(義兵)을 모아서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선조 26)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에 갔는데, 병조 판서(判書)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명(明)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통역을 맡아 그 군대를 안내하였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18일) 1594년(선조 27) 4월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훈련도감(訓練都監) 도청(都廳)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22일) 그해 7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대간(臺諫)에서 정철(鄭澈)을 탄핵하자 이시발이 이에 반대하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로 좌천되었다.(『선조실록』 27년 7월 27일),(『선조실록』 27년 8월 7일),(『선조실록』27년 8월 8일) 얼마 후 병조 판서이항복이 이시발을 불러 다시 병조 좌랑으로 임명하고 군사 기밀(機密)의 업무를 맡겼다.(『선조실록』 27년 9월 27일) 그해 겨울 명나라 유격(游擊)진운홍(陳雲鴻)이 왜군의 본영(本營)에 가서 왜장(倭將) 코키시 유나나카[小西行長]에게 황제의 조서(詔書)를 전달하고 왜장(倭將)을 설득할 때 이시발이 통역으로 따라갔다가, 왜적의 동태를 정탐하고 돌아와서 왜적의 정세를 자세히 임금에게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7년 12월 19일),(『선조실록』 27년 12월 20일),(『선조실록』 28년 2월 2일),(『선조실록』 28년 2월 3일),(『선조실록』 28년 2월 10일)

1595년(선조 28) 봄 선조가 특별히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하였다. 충청도순안어사(忠淸道巡按御史)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순찰하면서 병력을 점검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그해 가을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596년(선조 29)에는 전라도순안어사(全羅道巡按御史)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방을 순찰하면서 병력을 점검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그해 7월 충청도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몽학이 농민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洪州)를 공격한 사건이었다.(『선조실록』 29년 7월 9일) 홍주목사(洪州牧使)홍가신(洪可臣)이 이들과 싸우며 성을 지켰으며, 충청도순안어사이시발이 전라도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홍주로 진격하였다. 결국 이몽학은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반란은 1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그 뒤에 이시발은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승진하였으나, 대간에서 이시발을 탄핵하는 바람에 이시발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청주 후영리(後潁里)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그해 가을 왜적이 재차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이 이시발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어 겨울에는 체찰부의 전략을 세우는 찬획사(贊劃使)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찬획사이시발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 청주(淸州)를 지키던 가운데 그해 가을 청주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20일) 그해 겨울 분조(分朝 :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이끌던 전주의 조정)의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어,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기 위하여 경리(經理)양호(楊鎬)가 조선으로 나오자, 그를 영접하고 안내하였다. 선조가 그 공으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선조실록』 31년 1월 22일) 1598년(선조 31) 봄 분조의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분조의 호조 참의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봄 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 출신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었지만, 곧 선조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선조실록』 32년 2월 12일),(『선조실록』 32년 윤4월 29일)

1601년(선조 34) 9월, 선조가 이시발을 또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세 번째로 임명하였다.(『선조실록』34년 9월 18일) 그 뒤에 이시발이 경상도관찰사의 임기를 채우자, 선조가 경상도관찰사를 연임시켰으므로, 이시발은 4년 동안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경상도 지방의 왜적을 방비하는 근본 대책을 마련하였다. 경상도 병영을 진주(晉州)에 설치하고, 수군(水軍)을 통합하여 지휘하는 통영을 고성으로 옮겨서 왜적에 대항하여 군사의 동원을 기동성이 있도록 개편하였던 것이다. 이때 왜적에 대항하는 방략을 기록한 『주변록(籌邊錄)』이라는 책을 지었다.

1604년(선조 37) 윤9월, 조정으로 돌아와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그해 11월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병조 참판이 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37년 11월 12월 6번째기사],[『선조실록』 37년 11년 12월 17일 5번째기사] 1605년(선조 38) 5월 여진족 홀라혼(忽刺溫) 우디케가 두만강 유역의 동관(潼關)을 침략하자, 선조가 이시발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하여, 6진(鎭)의 번호(藩胡 : 6진 주변에 살던 오랑캐)를 진정시키게 하였다.(『선조실록』 38년 5월 29일),(『선조실록』 38년 5월 29일) 홀라혼 우디케는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후룬하(呼蘭河) 일대에 살던 해서 여진(海西女眞)이었다. 당시 만주의 여진족은 오랑케·오도리족의 건주여진(建州女眞)과 우디케족의 해서 여진으로 구분되는데, 오도리족 출신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의 오랑케족을 모두 통일한 다음에 타이가 삼림 지대에 살던 해서 여진의 우디케족을 정벌하는 중이었다. 누루하치가 본거지를 목단강(牧丹江) 유역의 흥경노성(興京老城)으로 옮기자, 홀라온 우디케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지배하려고 조선을 자주 침입하였던 것이다.

1606년(선조 39) 함경도관찰사이시발은 6진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포루(砲樓)를 설치한 후 군사와 무기를 점검하였다. 또 함흥의 감영(監營)에 토성(土城)을 쌓고, 만갑정(萬甲亭)과 진북루(鎭北樓)를 세웠다. 이시발이 번호를 다시 조선의 지배 아래에 두려고 오랑캐 지역을 위무하자, 누르하치와 싸우다가 패배한 홀라온 우디케의 대추장도 조선에 복속하였다. 그해 5월 관찰사이시발은 홀라온 우디케의 대추장에게 조선의 직첩을 주고 녹봉으로 포목(布木) 1백 필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9일) 1607년(선조 40) 두만강 밖의 번호들이 홀라온 우디케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모두 누루하치에게 귀순하려고 하자, 이시발은 다시 함경도관찰사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이시발은 병으로 함경도관찰사를 사임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함경도의 국경을 방비하는 문제를 조목별로 진달하였다. 그해 9월 이시발은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12월에는 평안도 군대를 총괄하는 체찰부(體察府)의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었다가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40년 8월 10일),(『선조실록』 40년 12월 20일)

1608년(선조 41) 2월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참판이시발은 빈전도감(殯殿都監)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때 선조는 57세였고, 이시발은 40세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가 되었다가 그해 6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갔다.(『광해군일기』 즉위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 행인(行人) 웅화(熊化)와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서로 잇따라 나왔는데, 평안도관찰사이시발이 명나라 사절을 잘 대접하여 맞이하고 보냈으므로 두 사신도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 1609년(광해군 1) 41세가 되던 해 11월에 평양에서 첫 번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상을 당하자, 평안도관찰사이시발은 휴가를 청하고 1610년(광해군 2) 고향 청주로 돌아가서 전부인 민씨를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이어 아버지의 묘소를 선영으로 이장(移葬)한 후 상소하여 3개월의 상복을 입게 해 달라고 청원하여 마침내 체직되었다. 그해 4월 청주 초평리(草坪里)의 선영에 초려(草廬)를 짓고, 선산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어 6월에는 명나라 조사(詔使) 염등(冉登)이 조선에 오자, 광해군이 이시발을 소환하여 사신을 안내하고 어전(御前)에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어전(御前) 통사(通事)로서 이시발의 역할을 크게 칭찬하고, 그해 7월 비변사의 유사(有司)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였다. 그해 9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12월에는 다시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3일) 1611년(광해군 3) 43세가 된 그는 9월에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신응거(申應榘)의 딸 고령 신씨(高靈申氏)와 재혼하였다. 후부인 신씨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이경휘(李慶徽)·이경억(李慶億) 형제를 잘 가르쳐서 두 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형은 판서가 되고, 동생은 좌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이시발은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어, 수군과 배를 총괄하는 주사대장(舟師大將)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 옥사>에 연루된 그는 절친한 친구 정경세와 함께 하옥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옥사가 무고(誣告)인 것이 밝혀져서 석방되었으나, 관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서울 도성 문 밖으로 출송(黜送)되었다.(『광해군일기』 4년 4월 2일) 이에 이시발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 청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은거하였다. 김직재의 옥사는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이 반대파인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을 제거하려고, 김직재로 하여금 서인의 중진인 황혁(黃赫)이 그의 사위 순화군(順和君)의 양아들 진릉군(晋陵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한다고 무고(誣告)하게 한 사건이다. 정경세·정호선(丁好善)·최유해(崔有海) 등 많은 동인·서인이 연루되었다. 서인이었던 이시발은 동인 정경세와 서로 친하였는데, 일찍이 이시발이 정경세에게 편지를 보내 시사(時事)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경세가 김직재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정경세의 문서를 조사하던 가운데 이시발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이시발을 아울러 하옥하였던 것이다.(『광해군일기』 4년 4월 1일)

1613년(광해군 5) 10월 광해군의 특명으로 직첩을 환급 받았고, 1614년(광해군 6) 11월 광해군이 이시발을 서용하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11월 27일 2번째기사] 1615년(광해군 7) 함경도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7월 경기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었으며,(『광해군일기』 7년 1월 20일) 1618년(광해군 10)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었다. 그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시발은 정홍익(鄭弘翼)과 같이 상소하여,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인조실록』 4년 1월 1일) 이러한 중에 이시발은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벌이던 <정청운동(庭請運動)>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사임한 후 서울 광진(廣津)에 우거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9일),(『광해군일기』 10년 3월 12일),(『광해군일기』 10년 4월 18일),(『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29일),(『광해군일기』 10년 5월 22일)

1619년(광해군 11) 2월 명나라에서 누르하치의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그해 3월 5도(五道) 원수(元帥)강홍립(姜弘立)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 군사 10여만 명과 함께 누르하치의 본거지 흥경노성(興京老城)을 협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원군이 부차령(富車嶺)에서 후금의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는 바람에 조방장(助防將) 김응하(金應河)는 전사하고, 원수강홍립과 부원수(副元帥)김경서(金景瑞)는 군사를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그때 체찰사(體察使)장만(張晩)이 평안도 군영에 있다가 병이 났다고 하자, 광해군은 특별히 이시발을 5도(五道) 찬획사(贊劃使)에 임명하여, 체찰사장만을 도와 후금의 누르하치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1월 24일),(『광해군일기』 11년 11월 24일),(『광해군일기』 11년 12월 25일) 1620년(광해군 12) 찬획사이시발이 평안도에 도착해서 평안도의 민폐(民弊)를 개혁하고,(『광해군일기』 12년 2월 27일) 광해군에게 평안도의 공물과 조세를 감해줄 것을 청하였다. 또 압록강 연안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할 방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임금에게 보고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10여 군데에 군영을 새로 설치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특별히 그를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고 어찰을 보내 위로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함락하자, 그 소식을 들은 찬획사이시발이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安州城)으로 들어가서 성벽을 수축하고 엄하게 수비하였다. 찬획사이시발이 광해군에게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누르하치가 반드시 중국 관내(關內)를 공략할 것인데, 우리가 그들의 배후를 공격할까봐 염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그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찬획사이시발은 안주성이 반드시 앞으로 오랑캐가 침입하는 요충지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남이흥(南以興)과 안주목사(安州牧使)김준(金浚) 등이 안주성에서 후금의 아민(阿敏)이 거느린 3만 명의 기병(騎兵)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모두 폭사하였다. 또 찬획사이시발이 민심의 수습 방안과 둔전(屯田)을 설치할 계획을 조목조목 계달하자, 광해군은 자신이 차고 있던 상방검(尙房劍)을 풀어 찬획사이시발에게 하사하고 명하기를, “대장 이하는 이 칼로써 다스리도록 하라.”면서 원수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 뒤 그는 광해군의 인척인 평안도 옥강보(玉江堡) 만호(萬戶)변일(邊溢)을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하였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다.(『광해군일기』 13년 5월 25일),(『광해군일기』 13년 5월 25일) 변일은 오랑캐 기마병 1백여 명이 옥강보를 침입하자, 그들과 싸우지도 않고 두려워하여 옥강보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찬획사이시발이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도원수(都元帥)한준겸(韓浚謙)이 평안도 중화(中和)에 원수부(元帥府)를 개설하자, 이시발이 다시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서인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그해 5월 인조가 반정 공신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찬획사이시발을 소환하여 서북 변방의 일을 의논하였다.(『인조실록』 1년 5월 6일) 이때 비변사에서 주청하여, 이시발을 비변사의 유사 당상관에 임명하였고, 의금부(義禁府) 지사(知事)와 춘추관(春秋館) 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해 7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判書)로 옮겼다.(『인조실록』 1년 7월 20일)

1624년(인조 2) 4월, 인조의 공신(功臣) 책봉에 불만을 품은 평안도병마사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임명되어 <이괄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때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고,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 도성을 점령하였다. 부체찰사이시발은 부원수이수일(李守一)과 손을 잡고 정충신(鄭忠信)·남이흥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길마재[鞍嶺]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이괄의 반란군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인조실록』 2년 2월 21일),(『인조실록』 2년 2월 21일) 반란군이 패배하여 달아나자 부체찰사이시발은 남보다 먼저 서울 도성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궐과 종묘를 청소하였다. 그 다음 이시발은 반란군에게 빌붙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가져다가 불태웠고, 이에 서울 도성의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어가(御駕)가 서울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체찰사이시발이 원수장만을 따라서 한강에 나가서 영접하니, 인조가 어가를 멈추고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인조는 이시발을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하고 백금(白金)을 하사하였다.

이시발은 부체찰사로서 사역원(司譯院) 제조(提調)와 주병도감(鑄兵都監) 제조, 3남(三南) 도검찰사(都檢察使)를 겸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는 역사를 감독하였다. 또 형조 판서로서 옥사를 논의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 하옥되어 심문을 받은 후 하룻밤만에 풀려났는데, 형조 판서에서 면직되었으나 겸직은 모두 변경되지 않았다. 그해 11월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청주의 집으로 돌아왔다.(『인조실록』 2년 11월 3일)

어머니가 동생 미전첨사(美錢僉使)이시득(李時得)의 임소에 있었으므로, 휴가를 얻어서 어머니를 찾아가서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자 중추부(中樞府) 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군기(軍機)의 여러 업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직하였다. 또 어머니가 병환이 낫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약제를 하사하였다. 1625년(인조 3)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왕민정(王敏政)을 보내어 인조를 책봉하였다. 이시발은 나라에 큰 경사가 났으므로, 반드시 책봉 의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큰 무더위 속에 애써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조정의 책봉과 하례 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병이 더욱 위독해지는 바람에 고향 청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1626년(인조 4) 1월 1일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8세였다.(『인조실록』 4년 1월 1일)

저서로는 『주변록』이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었다. 문집으로는 『벽오유고(碧梧遺稿)』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이시발의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시발은 급히 고향 청주로 내려가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산속으로 피난시켰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으므로, 이시발은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 청주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청주성을 점거한 왜적을 공격하여 쫓아냈다. 1593년(선조 26) 어가가 평안도 강서(江西)에 머물고 있을 때 이시발이 행재소로 달려가서 상소를 올려 임금이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서 민심을 수습할 것을 청하였다.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심희수(沈喜壽)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난리가 난 뒤로 일찍이 이러한 의논을 과감히 드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도 뒤이어 임금에게 다시 서울 도성으로 돌아갈 것을 적극 청하였으나, 겁에 질린 선조는 어가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의주로 향하였다. 이후 이시발은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통역을 하면서 병법을 배웠다.

1594년(선조 27) 4월 낙상지가 이시발을 칭찬하고 적극 추천하자, 선조가 이시발을 병조 좌랑에 임명하여 훈련도감 도청을 겸임하게 하였다. 또 중국어를 잘한다고 하여 승문원 교수(敎授)에 임명되었다, 승문원 교검(校檢)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7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대간에서 <건저문저(建儲問題)>로 실각한 서인의 영수 정철을 심하게 탄핵하였다. 정언이시발은 서인으로서 인피(引避)하고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체직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좌천되었다. 이때 병조 판서이항복이 이시발을 불러 다시 병조 좌랑으로 임명하고 자기의 보좌관로 삼은 후 군사 기밀의 업무를 모두 맡겼다. 그해 겨울 명나라 신종(神宗)만력(萬曆) 황제가 유격 진운홍을 보내 왜군의 본영(本營)에 가서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고 왜장(倭將)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시발이 중국어에 능통하고 일 처리에 민첩하다고 하여 특별히 선발되어, 명나라 유격 진운홍과 함께 왜군의 본영으로 찾아가서 왜장 코키시 유나나카를 만났다. 선조는 이시발에게 왜적의 정세를 자세히 정찰해 오도록 명하였고, 이에 병조 좌랑이시발은 왜적의 동태를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1595년(선조 28) 봄 왜적의 정세를 정찰하여 정확하게 보고하였다고 하여, 선조가 특별히 병조 정랑에 임명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충청도순안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순찰하면서 병력을 점검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그해 여름 명나라 제사(制使) 이종성(李宗城)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서울에 오자, 병조 정랑이시발을 불러 어전에서 통역을 시켰는데, 통역을 익숙하고 민첩하게 잘하였으므로 선조가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그해 가을 성균관 사예에 임명하였다.

1596년(선조 29) 전라도순안어사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방을 순찰하면서 병력을 점검하였다. 그해 7월 충청도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몽학은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며 농민들을 선동해서, 농민 수천 명이 홍주를 공격하였다. 홍주목사홍가신은 이들과 싸우면서 성을 지켰는데, 전라도순안어사이시발이 전라도에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홍주로 진격하였다. 얼마 후 이몽학은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반란은 1개월도 못 가서 평정되었다. 선조가 그 공을 포상하여 그를 장악원 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대간에서 이시발에 대하여 “병력을 점검하면서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이시발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청주 후영리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그해 가을 왜적이 재차 침범하려고 하므로, 체찰사이원익이 이시발을 불러서 종사관으로 삼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해 겨, 체찰부의 전략을 세우는 찬획사가 되어, 충주를 중심으로 왜군과 싸우고자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수축하고, 또 조령(鳥嶺)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다시 침략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조령을 넘지 않고 충주의 뒤쪽으로 돌아서 북상하였으므로, 찬획사이시발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 청주로 돌아와서, 청주에서 왜군과 싸울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청주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병력이 너무나 모자랐으므로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곧 명나라 군대를 따라 왜적을 추격하여 경상도 의성(義城)에까지 이르렀다. 그해 겨울 분조의 호조 참의에 임명되어 군량미를 수송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또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하기 위하여 명나라 경리 양호가 조선으로 나왔는데, 그를 영접하고 안내하였다. 선조가 그 공 경상도관찰사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 이때 경상도관찰사이시발은 경주(慶州)에 성을 쌓고, 중론을 수렴한 다음에 불편한 점을 해소하였다.

1598년(선조 31) 봄 분조의 공조 참의에 임명되어, 경주에 산성을 쌓을 자리를 시찰하였다. 이어 분조의 호조 참의가 되어서는 충주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오서린(吳瑞麟)의 명나라 군대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1599년(선조 32) 봄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자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왜적에게 복수하고, 우리나라를 자강(自强)하는 방책을 개진하였는데, 선조가 그 방략을 가납(嘉納)하였다. 그러나 북인(北人) 출신 대간 박승업(朴承業)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는 바람에 경상도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20일도 채 되지 않아,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원래 서인과 동인의 대립이 심하였고, 당시 동인이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으로 갈라져서 싸웠는데, 북인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이 경상도관찰사이시발의 인사에 대한 공정성을 문제 삼아 대간을 통해 감사이시발을 탄핵하게 하였던 것이다.

1601년(선조 34) 9월 선조가 이시발을 또 다시 경상 관찰사에 세 번째로 임명하였다. 이시발은 이를 극력 사양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고, 경상도관찰사의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는 그대로 유임시켰다. 당시 선조는 당파 싸움을 초월하여, 이시발을 경상도관찰사로 4년 동안 지내게 하면서, 경상도 지방에 왜적을 방비하는 근본 대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때 그는 경상도 병영을 진주에 설치하고, 수군을 통합하여 지휘하는 통영을 고성으로 옮겨, 왜적에 대항하여 군사의 동원을 기동성 있도록 개편하였다. 그리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략을 기록한 『주변록』이라는 책을 지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이 지나간 왜란의 역사를 반성하는 책이라면, 이시발의 『주변록』은 앞으로 왜적에게 복수하고 우리나라를 자강하는 방략을 제시한 책이다.

성품과 일화

이시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채가 준엄하고 고결하였으며, 성품이 침착하고 과단하였다.

1569년(선조 2) 이시발은 충청도 청주 후영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된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이시발·이시득(李時得) 형제를 어렵게 길렀으므로, 이시발 형제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남달랐다. 형제가 조금 성장하자, 어머니는 이시발 형제를 청주에 살던 먼 친족 이덕윤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스승 이덕윤은 역학으로 유명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시발은 부지런히 글을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두루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열심히 연구하였으므로 주자(朱子)의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공자(孔子)·맹자(孟子)와 주자 등 선유(先儒)의 학설을 연구하는 데에 힘을 쏟았으나,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19세 때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혼인하였는데, 어머니와 부인 민씨가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시발은 벼슬길에 나가서 직책을 맡았을 때에는 나라를 위하여 좋고 나쁜 일을 가리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업무를 추진하였다.

이시발은 중국어를 독학으로 익혔다.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에 분속되자 그는 중국어를 잘 사용하는 승문원의 다른 통사(通事)와 비교할 때 자신의 중국어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고향 청주로 돌아가서 중국어를 더욱 연마한 후 이듬해에 다시 승문원으로 돌아왔다. 이에 이시발은 중국어로 인정을 받았고, 병조 판서이항복이 그를 추천하여 명나라 장수 낙상지에게 가서 통역을 하며 병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낙상지 장군이 이시발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기를, “중국에서 찾아보더라도 이러한 인물은 구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남하하다가 청주에 이르렀을 때, 낙상지 장군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이시발의 어머니를 찾아가 뵐 정도였다. 그 뒤에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다음 명나라 군사가 서울에 진주하였는데, 낙상지가 선조에게 이시발을 추천하기를, “이시발은 남다른 재주를 가졌으니, 전하께서 그를 크게 등용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명나라 장수가 오면, 병조 판서이항복은 이시발에게 반드시 중국 명나라 장수와 군사를 접대하는 업무를 맡겼다.

이시발의 성격은 침착하고 여유로웠으므로, 아무리 다급한 일을 당하더라도 당황해서 실수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한스럽게 여긴 나머지, 숙부 미전첨사이시득을 친아버지나 다름없이 효성으로 섬기고 공경하였다. 남의 착한 행동을 보면 기뻐하여 칭찬하였으나, 남의 과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착하고 어진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불초한 사람에게 원망도 듣지 않았다. 또 이시발의 성격이 영민하고 과단하였으나, 원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기무(機務)가 많이 쌓여 있더라도 한번 눈으로 열람하고 손으로 결제하면, 타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시발은 일을 처리할 적에 대부분 목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항상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시발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왜구를 막을 방안을 『주변록』에 저술하고, 그 방략에 따라 경상도 병영을 진주에 두고, 통영을 고성으로 옮겼다. 이시발이 왜구와 성패를 판가름할 대책을 미리 강구한 것은 그의 스승 서계이덕윤에게 역학을 배워 앞날을 예견하는 역술을 익힌 결과였다. 또 후금의 누루하치가 처음에 그 세력이 아주 미약했을 때 이시발이 군관 신충일(申忠一)을 보내 그 본거지 헤투알라[興京老城]를 정탐하게 하였다. 이때 누루하치가 용병(用兵)하는 씨족 군사 ‘4기병(旗兵)’, 이른바 후일의 ‘8기병’에 대하여 보고를 받고, 우리나라의 후환(後患)이 되리라고 걱정하였다. 신충일의 보고서가 바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이다. 그러므로 이시발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국경의 성벽을 수축하고 병사를 훈련하는 등 후금 오랑캐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또 둔전을 설치하고 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비변사에 건의하였으나,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은 안일에 빠져 그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결국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과 10년 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큰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또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으로 유폐시키려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청운동을 전개할 때에도 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시발은 조정에서 쫓겨나 고향 청주 후영리에 은거하였다. 일찍이 청주 후영리에다 터를 잡아 새집을 짓고 그 주변에 푸른 오동나무를 심었는데, 이시발은 고향의 산수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호를 ‘후영리에서 물고기를 잡는 은거자’라는 뜻의 ‘후영어은(後穎漁隱)’이라 불렀고, 또 ‘벽오(碧梧 : 푸른 오동나무)’라고도 불렀다.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 알려진 신흠·오윤겸·정엽 등과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어 서로 수창(酬唱)하였다.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정경세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시발의 학술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 이시발은 서인이고 정경세는 동인이었으나, 이시발은 당파를 초월하여, 여러 당파 사람과 두루 교류하였다.

이시발의 문장은 문체가 미려(美麗)하고, 그 내용이 풍부하여, 저절로 문장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문단의 맹주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시발의 앞에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이시발은 문장보다 학문의 연구에 힘을 더욱 쏟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이시발이 죽고 난 다음 몇 권의 유고가 그의 집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이시발의 신도비명에 따르면, “이시발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지은 『주변록』 한 책이 있으며, 유고 약간이 그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현재는 이시발의 문집 『벽오유고』는 8권 4책의 필사본이 남아 있으나, 저서 『주변록』은 남아 있지 않다. 『벽오유고』도 서문과 발문(跋文)은 없어서 편찬자와 간행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이시발의 아들 이경휘·이경억 형제가 판서와 정승으로 출세하였기 때문에 두 아들이 아버지 유고를 편집 간행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의 저서 『주변록』은 현재 실전되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는 충청도 진천현(鎭川縣) 동쪽 초평리(草平里)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처음에 충청도 청주에다 장사를 지냈다가, 뒤에 충청도 진천현(鎭川縣)의 지금 자리로 이장하였다. 지금 무덤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부모산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장 박춘무 부자와 의병 지휘관 이시발·한혁(韓赫)·정순년(鄭舜年)·민여함(閔汝函)·박홍원(朴弘遠) 등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또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에 청주 출신 의병을 기리는 민충사(愍忠祠)가 세워져 있는데, 봄과 가을에 제향한다.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 나라에서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때 시호도 아울러 내려주었다. 그의 시호를 청할 때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여흥 민씨는 진사 민경남(閔敬南)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둘째 부인 고령 신씨는 승정원 승지 신응구(申應榘)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이경연(李慶衍)이고, 차남 이경휘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3남 이경억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장녀는 충의위(忠義衛)이창운(李昌運)에게, 차녀는 장령(掌令)정백형(鄭百亨)에게, 3녀는 유학(幼學) 조중소(趙重素)에게 각각 시집갔고, 4녀는 부사(府使)서정리(徐貞履)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3남 1녀를 낳았는데, 서출 장남 이경충(李慶忠)은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고, 서출 차남 이경선(李慶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내다가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서출 3남 이경종(李慶從)은 무예에 종사하였으며, 서출 딸은 참판(參判)박정(朴怔)의 첩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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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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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조방목(國朝榜目)』
  • 『벽오유고(碧梧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서계집(西溪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갑진만록(甲辰漫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축록(己丑錄)』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고운집(孤雲集)』
  • 『기언(記言)』
  • 『고대일록(孤臺日錄)』
  • 『후광세첩(厚光世牒)』
  • 『속잡록(續雜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명재유고(明齋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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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정편록(混定編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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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백일기(靑白日記)』
  • 『청음집(淸陰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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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곡집(霞谷集)』
  • 『한강집(寒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