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암(李純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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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7년(선조 30)~1656년(효종 7) = 60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지평(持平)·형조정랑(刑曹正郞)·예조정랑(禮曹正郞)이다. 자(字)는 유훈(幼薰)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금계군(錦溪君)이인수(李仁壽)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사과(司果)정인길(鄭仁吉)의 딸이다. 덕원군(德源君: 세조의 서출 제 1왕자)이서(李曙)의 4세손이고, 만각(晚覺)이영언(李英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때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예조정랑(禮曹正郞)과 사헌부 지평(持平)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인조가 <강빈(姜嬪)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소현세자 빈 강씨(姜氏)와 세 아들을 죽이려고 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이응시(李應蓍)와 함께 이를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방되었다. 그 뒤에 10여 년 동안 지방의 수령관을 지내다가, 효종 때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642년(인조 20)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6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6품의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1643년(인조 21)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가서 임기를 채우고, 1645년(인조 23) 조정으로 돌아와 형조정랑(刑曹正郞)·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23년 5월 6일],[『승정원일기』인조 23년 7월 24일] 1646년(인조 24)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24년 3월 18일) 그때 사헌부 장령(掌令)이응시(李應蓍)가 <강빈(姜嬪) 옥사(獄事)>에 대하여 간하다가 인조의 뜻을 거슬러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지평이순암이 동료인 이응시를 변호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청요직(淸要職)에서 밀려나 지방의 관직만을 역임하였다.[비문]

1647년(인조 25) 전라도 도사(都事)가 되었다가,[『승정원일기』인조 25년 8월 5일] 황해도 도사(都事)로 전임되었다.[비문] 1648년(인조 26) 평안도 안주 판관(安州判官)이 되었다가,[『승정원일기』인조 26년 7월 11일]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었으나, 다시 지방으로 나가서 충청도 옥천 군수(玉川郡守)가 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지방의 수령관을 지내다가, 효종 때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는데, 1656년(효종 7) 서울 집에서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60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여 곧은 도리로서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았고, 생활이 아무리 곤궁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높은 벼슬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낮은 자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비문]

이순암은 세조의 서출 제 1왕자 덕원군(德源君)이서(李曙)의 4세손인데, 증조부는 연성군(蓮城君)이지(李潪)이고, 조부는 인강군(仁江君)이량(李樑)이며, 아버지는 금계군(錦溪君)이인수(李仁壽)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할 때, 금계군이인수가 종친의 여러 공자(公子)들을 거느리고 간(諫)하다가 죄를 얻어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인조(仁祖)가 즉위하면서, 관작을 되돌려주고 그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도록 명하였다. 어머니 현부인(縣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세종 때 참찬(參贊)정갑손(鄭甲孫)의 4세손이자, 사과(司果)정인길(鄭仁吉)의 딸이다. 이순암은 금계군이인수의 4남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다.[비문]

이순암은 어렸을 때부터 만각(晚覺)이영언(李英彦)에게 가서 글을 배웠는데, 이영언은 헤진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고 누추한 곳에 자면서도 오로지 독서만을 좋아하고 옛사람들이 즐겼던 도(道)를 추구하였다. 인조가 유일(遺逸)을 등용할 때, 이영언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이영언은 제자들을 가르칠 대, 한결같이 『예기(禮記』와 『관자(管子)』를 표준으로 삼고,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기언』 8권] 이순암은 스승 이영건의 가르침에 따라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순종하는 데에 효도와 우애를 다하였다. 그는 학문을 열심히 닦고 그 학문을 몸소 실천하였으므로, 사림(士林)에서 그를 존경하였다.[비문]

1646년(인조 24) 3월, 이순암이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소현세자의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 강석기의 딸)를 싫어하였는데, 결국 <강빈(姜嬪) 옥사>를 일으켜 강빈과 그녀의 세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당시 사헌부 장령(掌令)이응시(李應蓍)는 <강빈(姜嬪) 옥사>를 거론하면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녀를 용서하여 줄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고, 스스로 북변의 귀양지를 택하게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지평이순암은 “이응시는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숨김없이 모두 다 말하였는데, 그의 충성을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중벌에 처하려고 합니다. 직간(直諫)하는 사람을 축출하여 언로(言路)를 막는다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리가 없습니다.” 하고 간쟁하였는데, 인조가 진노하여 지평이순암을 내쳤다. 이로 인하여 이순암은 연달아 좌천되었고, 이후 다시는 청요직(淸要職)에 등용되지 못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마전군(麻田郡) 동쪽 화진(禾津)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경산이씨(京山李氏)는 이민선(李敏善)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운태(李云泰)·이운영(李云永)이고, 딸은 참봉(參奉)신한선(申翰宣)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側室)에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서출 아들은 이운학(李云澩)이고, 서출 딸은 홍덕규(洪德奎)에게 시집갔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언(記言)』
  • 『여헌집(旅軒集)』
  • 『청음집(淸陰集)』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