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현(陰城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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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음성현 |
한글표제 | 음성현 |
한자표제 | 陰城縣 |
상위어 | 충청도(忠凊道) |
동의어 | 잉홀(仍忽), 설성(雪城), 잉근내(仍斤內) |
관련어 | 청안군(淸安郡)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음성현(陰城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6년 11월 1일, 『현종실록』 3년 2월 4일 |
충청북도 음성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음성현(陰城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속한 현이다. 15세기에 호수는 171호, 인구는 726명이었다. 토지는 1,99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1/3 정도였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33명, 선군(船軍) 46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음성군으로 승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음성현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음성현으로 고치고, 지금의 진천 지역인 흑양군(黑壤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충주의 임내로 삼았다. 고려후기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434년(세종 16)에 음성을 경기도 소속으로 옮기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세종실록』 16년 11월 1일). 음성은 작은 현이지만,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상에 위치했기 때문에 현으로 독립시켰다. 하지만 현이 작은데 왕래가 많아 현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1477년(성종 8)에는 음성현민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용안역을 충주 소관으로 옮겼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 되었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1명, 군관 10명, 아전 9명, 지인 4명, 사령 7명, 관노 6명, 관비 10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임진왜란 때 음성이 큰 고통을 겪어서 1592년(선조 25)에 현을 폐지하고 청안군에 붙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진정으로 1618년(광해군 10)에 다시 복구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분실했다는 이유로 현을 폐지하고 괴산군에 붙였다가(『현종실록』 3년 2월 4일) 얼마 뒤에 복구하였다. 1900년대 초까지도 음성은 4개 면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현이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는 편호 1,840호, 인구는 남자 3,925명, 여자 4,471명이었다. 토지는 밭 936결, 논 526결이었다. 1900년(고종 37)의 『음성군양안(陰城郡量案)』에는 가호가 2,603호, 토지가 1,392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충청도 충주부 음성군으로 삼았다. 1906년(고종 43)에 충주군 소속 13개 면을 음성으로 옮겼고, 1913년에 다시 2개 면을 추가로 편입시켰다.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17면에서 9면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음성군양안(陰城郡量案)』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