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희호(隆熙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 1908년(융희 2) 4월 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운행된 부산-신의주간 급행열차.

2. 1909년(융희 3) 2월 탁지부가 일본에 발주한 관용 기선.

개설

1. 기차 융희호(隆熙號)는 1908년 4월 1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운행된 부산-신의주간 급행열차였다.

2. 선박 융희호는 1909년 2월 탁지부가 일본에 발주하여 부산에 들어온 700톤급 기선(汽船)으로, 정부 소유였다.

연원 및 변천

1. 1905년 개통된 경부선과 1906년에 개통된 경의선이 처음으로 연결되어 947.2㎞에 이르는 철도가 남북의 국토를 종단했다. 융희호는 1908년 4월 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운행된 부산-신의주간 급행열차였다. 당시 융희호 견인을 위해 1911년에는 6량의 미국식 증기 기관차인 ‘아메형’이 도입되었는데, 그 이름은 미국을 뜻하는 아메리카(America)에서 앞의 두 음절을 따서 지은 것이다.

1911년 11월에는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고 한국-만주간에 동일한 레일 간격[軌間]을 가진 철도가 동일 궤도상에서 접속함으로써, 융희호는 중국 대륙으로 연결되어 길림성의 수도인 창춘[長春]까지 이어졌다. 융희호가 창춘까지 이어진 것은 일본에서 만주까지 화물을 운송하는 수단을 마련한다는 일본의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융희호의 시간표는 한국의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의 발착 시간에 맞추어 편성되었고, 부산발 발착지는 부산역이 아니라 관부연락선의 접안 시설인 잔교(棧橋)였다.

2. 선박 융희호는 1909년 2월 탁지부가 일본에 발주하여 부산에 들어온 700톤 급 기선으로 정부 소유였다. 이 배는 일본인 요시다 히데지로[吉田秀次郞]로부터 임차한 것인데, 함경도까지 운항하는 북한항로(北韓航路)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1909년 12월 7일 탁지부에서 국고 잉여금 가운데서 6,216원을 융희호의 수선비로 지출해 줄 것을 내각에 요청하였고, 총리대신이완용이 정부 논의를 거쳐 재가를 받았다.

그러나 융희호는 1910년 6월 30일 울산 부근 연해에서 좌초되었다. 융희호는 불가항력적인 재해에 의한 것이라도 파손 시 총 63,000원을 해마다 일정 금액씩 배상한다는 연부배상(年賦賠償)의 계약을 체결했고, 조사 결과 과실이 분명한 것으로 판명되어 그 해 7월 요시다에게 배상금 지불이 결정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근대적 육상 운송과 해상 운송 교통수단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