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정(流霞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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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예종의 차남인 제안대군이 한강두모포 상류에 지은 정자.

개설

유하정(流霞亭)은 제안대군이 한강의 경치 감상과 풍류를 향유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조가 가장 활발하게 이용했으며,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영조대의 중수를 거친 후 철종대까지 풍류 장소로 활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두모포 상류에 있었다. 정조대에는 규장각(奎章閣)에 하사하여 학문을 하는 신하들이 쉴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유하정은 『동국여지비고』에 예종의 차남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살았던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된 건물로 기록되었다. 제안대군은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으나 광해군대에 이르러서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방치되었다. 이에 비변사(備邊司) 당상이 쇄락한 유하정을 헌 후 재목으로 영정(營亭)을 짓는 데 사용했다(『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 봉림대군이 잠저에 머물 때 유하정을 다시 짓고 머물기도 했다. 이때 유하정은 관청 소속 건물로 백성들이 관리했다. 영조는 “유하정은 곧 의안대군(宜安大君)이 유람하던 곳인데, 또한 조종조 때부터 하룻밤 임금이 잔 방이 있다.”라는 말로 관리가 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수리하도록 명했다(『영조실록』 48년 4월 4일). 유하정을 수축하는 과정은 「유하정기(流霞亭記)」라는 기록을 통해 남아 있다.

가장 활발하게 이용한 왕은 정조이다. 1781년(정조 5)에 규장각에 하사하여 각원들의 풍류 장소로 활용했다(『정조실록』 5년 2월 23일). 규장각 신하들에게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유하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어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순조 이후 연회는 없어졌다가 철종대에 다시 풍류 장소로 활용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철종실록』 8년 윤5월2일).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1781년(정조 5)에 유하정을 규장각에 소속시켰다. 규장각에서 지켜야 할 유하정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하정이 이미 규장각에 소속되었으니, 독서당의 망호정의 예에 의거하여 계절에 따라 나가 놀 수 있도록 하며, 각료로서 실질적인 직책이 없는 자도 정자에 가서 머물며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정자 부근의 동네 사람들에게 역(役)을 면제해 주고 정자를 지키게 하며 사환으로 부리는 일도 망호정의 예를 따라서 한다.

조선초에 영의정 유관(柳灌)이 송나라 태조가 포연을 내린 고사를 인용하여 3월 3일, 9월 9일을 좋은 절기로 삼아 신하들에게 경치가 좋은 곳을 가려서 놀고 즐기게 함으로써 태평한 기상을 나타내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제 규장각을 새로이 창건하였으니 의당 옛 일을 따라야 한다. 해마다 3월과 9월에는 반드시 한가한 날을 선택하여 봄가을로 놀고 즐기되 해당 날짜에 앞서 글을 올려 허락을 얻은 후에 유하정으로 나아간다.”라는 내용이다. 이로써 유하정의 관리는 인근 백성이 역을 면제받고 대신했음을 알 수 있으며, 학문하는 관리가 수려한 경치를 보면서 연회를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규정한 정조의 배려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 임의제, 「조선시대 서울 누정의 조영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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