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상(源義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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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막부 9대 장군.

개설

실정막부의 장군인 족리씨는 조선과 통교 시에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였다. 의상은 1465년 8대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의 장자로 태어났다. 모친은 정실인 일야부자(日野富子)이다. 1488년 의희(義熙)로 개명하였다.

의정은 아들이 없어 1464년 동생인 의시(義視)를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나 이듬해 의상이 출생하였다. 모친인 부자는 의상을 후계자로 하고자 유력 영주인 산명지풍(山名持豊)과 결탁하였고 이에 의시는 역시 유력 영주인 세천승원(細川勝元)을 후원자로 삼아 장군 계승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여기에 사파씨(斯波氏)·전산씨(畠山氏)의 가독계승 문제까지 겹쳐 이른바 응인(應仁)의 난이라고 불리는 전국적 전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의정은 정치에 관심을 잃어 1473년 장군자리를 아들인 의상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장군직에 오른 초기에는 모친인 부자가 후견인으로 막부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1477년 난이 종식된 후부터 의상은 쇠퇴한 막부권력의 회복에 의욕을 가지고 임하였다. 1487년 근강(近江)의 영주 육각고뢰(六角高頼)를 토벌하기 위하여 스스로 출진, 막부의 위신회복을 꾀하였다. 이 토벌전은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육각씨의 저항은 계속되어 그 뒤 1년 5개월여 동안 뚜렷한 전과 없이 의상의 출진은 장기화되었다. 그 와중에 1489년 3월 의상은 진중에서 2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활동 사항

의상의 장군 재임기(1473~1489년)동안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모두 5회 파견되어 왔는데 이들은 모두 전임 장군인 ‘원의정(源義政)’ 명의의 사신들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상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그가 사망한 뒤인 1491년(성종 22)의 기록에서였다. 전임 일본국왕(막부의 장군)의 사망과 새 국왕의 등극에 대하여 예조로부터 의정이 죽고 그 뒤를 원의재(源義材)가 이었다는 주문이 있었는데(『성종실록』 22년 9월 5일), 이에 대하여 호조 판서이극돈(李克墩) 등은 원의정이 원의상에게 전위하였고 원의상이 후사 없이 죽어 원의재가 자리를 이었다고 정정하고 있다[『성조실록』 22년 9월 5일 6번째기사]. 이 기록이 의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한편, 의상의 장군 재임 시기는 일본으로부터의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 문제가 표면화되던 때였다. 1474년 일본국왕의 서계에서는 그 전의 사절(1470년)이 위사였다는 취지의 언급이 있고(『성종실록』 5년 10월 27일) 1475년의 사절도 위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圈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石田晴男, 『應仁・文明の亂』(戰爭の日本史 9), 吉川弘文館, 2008.
  • 민덕기, 「실정막부(室町幕府)의 대명조공(對明朝貢) 중재요청과 조선의 대응」, 『일본역사연구』 1, 일본사학회, 1995.
  • 신동규, 「<조선왕조실록> 속의 일본국왕사와 위사」,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국왕사의 조선통교」,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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