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묘(原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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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한 선대의 위판과 초상화를 모셔두고 제례를 지내는 건물.

개설

원묘는 1432년(세종 14)에 경복궁에 조성되었으며, 이를 봉성전(奉誠殿)이라 하였다(『세종실록』 14년 9월 17일). 원묘는 중국 한(漢)나라 혜제(惠帝) 때 소손통의 건의로 시조 이하 조상을 위하여 처음 건립되었다. 송나라의 신종이 경령궁(景靈宮)에 원묘를 지었고, 명대에는 왕제(王帝)의 가묘(家廟)로서 자금성(紫禁城) 안에 봉선전(奉先殿)이라는 원묘를 설치하였다. 고려 때에는 궁궐의 북쪽에 원묘로 경령전(景靈殿)을 지었다.

조선시대 원묘의 형태로 건립된 건물은 문소전(文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이 있었다. 문소전은 태조의 원묘이며 광효전은 태종의 원묘였다. 1432년에 경복궁 북쪽에 원묘를 새로 짓고 문소전과 광효전을 통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 처음 설치된 원묘는 태조를 위하여 건립한 문소전이다. 문소전은 1406년(태종 6)에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며 태종의 어머니가 되는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인소전(仁昭殿)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태조실록』 7년 11월 11일). 태조가 승하하자 태조의 초상화까지 함께 모시고 제례를 지냈다. 이를 전례로 하여,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2년 전 승하한 태종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혼전 광효전에 태종의 위패도 같이 모셔 혼전 의례를 거행했다. 혼전 의례 후에는 태종의 위패를 모시고 원묘로서 제례를 계속 행하였다.

1431년(세종 13), 일정한 제도 없이 태조의 문소전과 태종의 광효전을 각각 운영할 경우 매 세대마다 각기 원묘를 세우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세종실록』 13년 12월 24일). 이에 1432년 옛 제도를 살펴 경복궁에 새롭게 원묘를 세우고 단일화하였다.

문소전에는 영정을 모시고 광효전은 위패를 쓰고 있어 제도를 하나로 결정해야 했다. 이때 황희(黃喜)는 사당에는 위패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영정을 그릴 때 수염이나 머리털 하나라도 다르다면 다른 사람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자의 경우는 살아 있을 때 화상을 그려 두지만 부인의 경우는 얼굴을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왕후의 초상화를 그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정초(鄭招)는 초상화를 두자고 주장했다. 종묘에 이미 위패가 있는데, 원묘에 또 위패를 두는 것은 이중으로 겹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도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니 이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결국 초상화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후침(後寢) 5칸을 지어서 태조와 태종의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고 뒤에 4대를 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후대에 칸수를 늘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매 칸마다 벽감(壁龕)을 만들어 각 실을 형성하고, 선(扇)과 개(蓋)를 설치하였다. 전전(前殿)은 3칸으로 조성하고 내부에 감실(龕室)을 만들지 않고 3칸을 통하게 하였다. 신위의 배치는 태조는 북쪽에서 남향하게 하고, 소(昭) 2위는 동쪽에서 서향하고, 목(穆) 2위는 서쪽에서 동향하게 하였다. 또 후침과 전전 사이에는 월랑을 지어서 신도(神道)로 사용하였다.

문소전과 광효전을 합하여 원묘를 새로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봉성전(奉誠殿)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한 달 후에 다시 문소전으로 바꾸어 이후 조선의 원묘 이름은 문소전이 되었다.

원묘에 초상화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것은 불교적인 방식이었다. 제례에 진설하는 제물로는 생선이나 고기 등을 올리지 않았고, 초기에 설치된 문소전은 불당을 갖추고 있어 불교색이 강하였다. 그러나 1420년(세종 2)에 고기 음식을 올리도록 하였고 의례를 정비하여 유교적 절차로 바꾸었다.

변천

중종 연간에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들은 원묘제가 부당하니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중종실록』 13년 4월 5일).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형제간의 왕위 계승으로 인종과 명종을 문소전에 모시는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여러 논란 속에서도 원묘는 지속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소실되고 문소전에 모셨던 위패는 버려지다시피 하여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를 강화 전등사(傳燈寺)에서 수습해 두었으나, 이미 많이 훼손되어 다시 모시기 어려웠다. 결국 위패는 정결한 곳에 묻고 원묘 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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