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기위(雲騎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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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공신에 대한 세습 작위 중 하나인 투와샤라 하판[tuwašara hafan, 拖沙喇哈番].

개설

운기위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경차도위(輕車都尉)·기도위(騎都尉)·운기위(雲騎尉)·은기위(恩騎尉) 등 청대의 공신에 대한 9개 봉작을 의미하는 ‘잘란 시라라 하판([世襲官], jalan sirara hafan)’의 여덟 번째에 해당하였다. 운기위의 초기 명칭인 투와샤라 하판은 순치제 시대인 1647년에 정해졌다. 청대에 공신에게 내린 정5품의 세습 봉작이었다.

담당 직무

청대 공신들에게 하사한 세습 봉작으로 관직과는 별도로 주어졌다.

변천

청대의 공신에 대한 9개 봉작은 순치 연간인 1647년에 정해졌다가 건륭 연간인 1736년에 한자식으로 개칭하는데, 이때 투와샤라 하판은 운기위로 바뀌었다. 투와샤라 하판은 반개전정(半箇前程)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공식 문서에는 운기위로 쓰였지만, 만문에서는 여전히 투와샤라 하판으로 기록되었다. 명대의 천총(千摠)에 해당하는 관직이지만, 세습되는 봉작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1721년 조선 숙종의 죽음을 치제하기 위하여 파견된 청의 사신 나첨(羅瞻)은 투와샤라 하판으로 나타났다(『경종실록』 1년 2월 12일). 반면, 1736년 투와샤라 하판이 운기위로 개칭된 이후인 1776년 영조의 죽음에 대한 조제와 정조의 책봉을 위하여 파견된 청의 칙사 각라만복(覺羅萬福)은 세습운기위(世襲雲騎尉)라고 나타났다(『정조실록』 즉위년 10월 27일). 가경(嘉慶) 연간인 1805년 조선을 방문한 칙사 서령(瑞齡) 역시 운기위로 나타나고 있다(『순조실록』 5년 6월 2일).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청실록(淸實錄)』
  • 『대청회전(大淸會典)』
  • 김양진·신상현, 「조선 지식인들의 청대 만주어 수용 연구」, 『한국실학연구』 30, 한국실학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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