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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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서나 옥책, 금보 등의 중요 문서나 물건 등을 의례에 사용하기 위하여 옮길 때 사용하던 가마.

개설

중국 황제가 내리는 칙서(勅書)나 왕·왕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옥책(玉冊), 금으로 제작한 왕의 도장 금보(金寶) 등의 중요한 문서나 물건 등을 의례에 사용하기 위하여 옮길 때 사용하던 가마를 말하였다. 용정자(龍亭子)로 표현할 때도 있다. 조선의 의례제도가 정비되면서 칙서 등의 중요한 문서나 황제가 하사하였던 인장(印章)과 같은 의미 있는 물건 등을 용정에 넣거나 꺼낼 때에 맞는 의식이 갖추어졌다. 조선 건국 직후의 국가 의례에서는 용정의 사용이나 역할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태종의 재위기에 명(明) 예부(禮部)에서 내린 칙서를 맞이하는 의주에서 용정의 사용이 처음 확인된다. 이후 세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의 예조에서 각종 의주를 제정하면서 용정의 사용 방식과 역할 등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태조와 정종의 재위기에 용정을 사용한 사례는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건국 직후부터 시행되었던 조선의 중요 의례는 당연히 용정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8년(태종 8) 명의 도지감(都知監)좌소감(左少監)기보(祁保)와 예부(禮部)낭중(郞中)임관(林觀)이 영락제(永樂帝)의 칙서를 가져왔을 때 제시하였던 의주에 용정에 관한 부분이 처음 확인된다(『태종실록』 8년 9월 24일).

세종이 즉위한 이후 예조에서 여러 의례의 절차와 형식 등을 정리해 보고하면서 용정의 사용 방식 등이 체계화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를 진행할 때,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은표(謝恩表)를 보낼 때, 상왕과 대비를 봉숭(封崇)하는 의례를 진행할 때 용정을 사용하였다. 용정은 칙서나 책보를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의례 및 형태

의례를 진행할 때 용정은 의례를 위해 임시로 마련한 왕의 자리인 장전(帳殿)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였고,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용정의 앞에는 향로를 두는 향정(香亭)을 두었다. 아울러 향을 맡아보는 관리인 사향(司香) 2명의 자리를 향정의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황제의 조서(詔書)가 도착하면 조선의 왕은 신하를 대동하고 몸을 굽혀 맞이하였다. 명 사신이 조서를 용정 안에 두고 나오면 사향 2명이 양쪽에서 향정을 받들고 계속 향을 피웠다. 이후 신하와 왕세자가 차례대로 출발하면 다음에 왕이 연(輦: 왕이 타는 가마)을 타고 따라갔다. 이후 의장(儀仗)과 고악(鼓樂)이 출발하고, 향정이 가면 다음으로 조서를 넣은 용정이 출발하였다. 용정의 뒤에는 명사들이 따라갔다(『세종실록』 10년 3월 19일)(『세종실록』 10년 3월 19일).

용정의 형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세종대의 기록 중에 황옥용정(黃屋龍亭)과 청옥용정(靑屋龍亭) 등이 등장하였다. 이를 통하여 용정의 지붕이 황색과 청색 등으로 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의례나 문서·물건 등의 성격에 따라 사용하는 용정이 구분되어 있었음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세종오례의(世宗五禮儀)』 중 「영사시제급조부의(迎賜諡祭及弔賻儀)」에는 2개의 용정을 사용하는 의례 절차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때 하나의 용정에는 중국에서 조선 왕을 승인하는 문서인 고명(誥命)을 넣고, 다른 하나의 용정에는 제문(祭文)을 넣어 의례를 진행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오례의(世宗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강제훈, 「조선 『세종실록』 「오례」의 편찬 경위와 성격」, 『사학연구』 107, 한국사학회, 2012.
  • 한형주, 「조선초기 조하의례에 대한 고찰-정지조하를 중심으로-」, 『명지사론 』13, 명지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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