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지(倭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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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로부터 수입한 닥나무로 만든 윤택하고 가벼운 종이.

개설

왜지(倭紙)는 왜닥나무[倭楮]가 조선에 공식적으로 수입되기 이전부터 중요한 서책의 인출 용지로 사용되었고, 왜닥나무의 수입 이후에는 연안 지역에 왜닥나무를 재배하여 조지서에서 직접 만들던 종이이다. 국가 주도로 왜닥나무가 보급된 세종조부터 조지서에서 왜지를 만들기 시작하여 왜닥나무의 보급에 국가적인 정성을 기울이던 성종 연간까지 만들어졌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에는 왜지를 저지(楮紙)와 비교하여 조선의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데 적합하나 무겁고 털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볍고 윤택하며 정치한[輕澤精緻] 왜닥나무만 못하다고 평가하면서, ‘경택정치(輕澤精緻)’ 4자로 왜지의 우수성을 표현하였다.

연원 및 변천

왜지는 그 원료인 왜닥나무의 역사와 관련된다. 1430년(세종 12) 세종은 예조에 명하여 책지를 만들 왜닥나무를 대마도에서 구해 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보다 2년 전인 1428년(세종 10) 7월 1일에 통신사로 하여금 “또 왜국의 종이는 단단하고 질기다 하니, 만드는 법도 배워 오도록 하라.”고 명을 내였는데(『세종실록』 10년 7월 1일), 이때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이 귀국 후 왜지가 단단하고 질김은 조작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료인 왜닥나무의 우수성에 있음을 보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조선에 전래된 왜닥나무는 경상도 동래와 경기도 강화에서 재배되었다. 강화의 왜닥나무가 재배되어 결실을 이루자 그 씨를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 남해·하동 등의 연해 지역에 파종하였으며, 이것을 전국적으로 보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방관들의 무관심으로 왜닥나무가 죽거나 무성하지 않자 1447년(세종 29)에 왜닥나무의 생장과 배양에 대한 지방관의 무관심을 탓하고 다시 왜닥나무를 연변 각주에 보내어 배양하게 하고, 그 생장 과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닥나무의 생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1452년(단종 즉위)에는 왜닥나무의 전국적인 보급을 위해 목관(牧官)·대도호부·도호부·지관(知官)·현관(縣官)에 정해진 양을 배양하게 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그 실적을 빙고(憑考)하도록 하였다. 이후 1461년(세조 7)에 영광의 시아도(時兒島)에 왜닥나무가 있다는 기사(『세조실록』 7년 8월 20일), 1462년(세조 8)에 영광 거두산(巨頭山)에 왜닥나무가 있어 그 수를 살펴 알리라는 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세조 연간에 왜닥나무가 연해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 8년 11월 12일).

또한 1500년대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왜닥나무의 산지로 경상도의 경주·울산·창원·거제·고성 및 황해도의 풍천 등 6개 지역이 기록되어 있고, 1600년대에 찬술된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도 남방(南方)의 해안 지역에 왜닥나무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1800년대에 편찬한 『대동지지』에도 왜닥나무의 산지를 경주·울산·거제·고성·풍천 등 5개 지역으로 기재되어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경상도 고성에서 여전히 왜닥나무가 생산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조선 전기 이후부터 불과 수십 년 전까지 기후와 풍토가 맞는 연해 지역에서 왜닥나무가 재배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반계수록(磻溪隨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 오용섭, 「왜저(倭楮)의 전래와 초조(抄造)」, 『서지학연구』1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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