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간수문(五間水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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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성곽에서 내수구가 통과해 흐를 수 있도록 만든 수문.

개설

한양은 성곽 내부에서 물줄기가 모여 청계천을 이룬 다음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수구가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성곽 동쪽에 동수문 하나만 설치했다. 이 동수문은 흥인문(興仁門) 남쪽에 위치하며 5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고 칭했다.

수원화성(華城)에는 2개의 수문을 두었다. 수원화성에는 대천(大川)이라는 수구(水口)가 있다. 수구가 들어오는 곳에는 화홍문인 북수문을 만들고, 수구가 나가는 곳에는 남수문을 쌓았다. 수구가 들어오는 곳에는 크게 누각 또는 수각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곳이 수문임을 표시했다.

한양은 따로 수구가 들어오는 곳이 없기 때문에 수문에 누각을 만들지는 않았다. 한양에는 청계천 외에 또 다른 물줄기가 있는데, 이 하천은 남산 자락에서 모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광희문(光熙門) 북쪽을 통해 흘러나간다. 따라서 이곳에도 수문을 만들었으며, 형태가 2칸이기 때문에 이간수문(二間水門)이라고 칭했다.

내용

전통적인 도시에는 항상 수구를 두었다. 수구는 풍수적인 용어로 도시 내에 흐르는 하천을 지칭한다. 수구는 풍수적인 관점에서 명당이 갖춰야 할 득수(得水)에 해당한다. 풍수적인 요인을 차치하더라도 도시 내에는 항상 하천이 흘러야 한다. 성곽 내에서 사는 사람들의 하수 방류와 같은 생활에 필수이기 때문이다. 도시 방어를 위해 성곽을 쌓을 경우 수구가 흘러 들어오고 나가는 부분에는 성곽을 바로 쌓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이 부분만 성곽을 쌓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럴 때 수구가 흐르는 곳에 수문을 설치했다. 수문의 규모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홍수가 발생해 흐르는 물의 양이 많을 경우에는 자칫 수문과 더불어 성벽이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문 역시 유사시를 대비한 방어 시설이다. 수문은 외부와 통하도록 열려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 적들이 내부로 침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수문에는 쇠살문[鐵箭門]을 설치해 외부인이 이곳을 통해 침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하천에 흐르는 물의 양이 많을 경우 나뭇가지 등의 부유물이 흐르다가 쇠살문에 걸려 수문을 막아 물이 범람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쇠살문에 철삭(鐵索)을 연결해 필요에 따라 개폐하도록 했다. 1421년(세종 3)에 큰 비가 와서 수재에 대비하기 위해 살대로 만든 둑인 수문의 전방(箭防)을 걷어 치워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수문의 쇠살문을 열라는 의미이다(『세종실록』 3년 6월 16일).

한양 성곽에 수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396년(태조 5)에 한양 성곽을 쌓으면서 수구의 양쪽을 석성으로 쌓았는데 높이는 16자, 길이는 1,050자였다(『태조실록』 5년 2월 28일). 수구의 양쪽에 제방을 쌓으면서 수문 역시 동시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쌓은 수문은 같은 해 7월 3일과 7월 5일에 폭풍우로 옹성(甕城)이 각각 1칸씩 무너졌다. 이로써 이미 수문이 여러 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옹성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혹시 홍예(虹霓)를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에 따르면 “성 동쪽에 수문이 있는데 처음에는 3개만 열었다. 장마를 만나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개의 문을 더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이미 오간수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수문에 대한 것은 1422년(세종 4)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4년 1월 16일). 1421년 장마 때 수문의 숫자가 적어 수구가 범람했으므로 이때 수문의 숫자를 늘렸다. 북쪽 수문이 3칸인데 1칸을 늘리자고 했고, 남쪽 수문이 2칸인데 1칸을 더 늘리자고 했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북쪽 수문을 2칸 늘려 5칸으로 완성한 듯하다(『세종실록』 4년 2월 23일). 그 결과 북쪽 수문이 5칸, 남쪽 수문이 2칸으로 정형화되었고, 이후 이를 오간수문, 이간수문이라 칭하였다.

한양의 수문은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다가 1907년(융희 1)에 토목국장인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유맹(劉猛)이 하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헐어 버렸다. 1908년(융희 2)에는 도시의 교통 흐름을 위해 흥인문을 제외한 흥인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헐어 버렸다.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다리를 만들고 오간수교(五間水橋)라고 불렀다. 1958년에 청계천복개공사를 시작했는데, 1961년에는 동대문 오간수문까지 복개하였다. 2003년에는 청계천 복원을 위해 오간수문지를 발굴, 조사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하천은 시간이 지나면 바닥에 흙이 쌓이게 마련이다. 하천 상류에서는 유속이 빨라 인근의 토사도 같이 물에 떠내려가는데 유속이 느린 곳에 도착하면 토사는 바닥에 쌓이고 물만 흘러나간다. 이런 까닭에 수시로 하천의 토사를 제거해야만 하천 범람의 위기를 막을 수 있다. 하천의 토사 제거 작업을 준천(濬川)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에서는 수많은 준천이 있었지만 가장 큰 규모로 준천을 실시한 때는 1760년(영조 36)이었다. 준천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영조는 수시로 오간수문에 나가 준천을 독려했다. 당시의 모습은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이라는 그림첩 중에서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 서울특별시, 『오간수문 실측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 2005.
      1. 그림1_00017956_오간수문, 『조선고적도보』.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