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진(影島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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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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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도진 |
한글표제 | 영도진 |
한자표제 | 影島鎭 |
상위어 | 진보(鎭堡) |
관련어 | 개운진(開雲鎭), 서평진(西平鎭), 포이진(包伊鎭)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허지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도진(影島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7년 9월 12일 |
개운(開雲)·서평(西平)·포이(包伊) 진을 합설하여 설치한 진.
개설
동래부 소속의 진보(鎭堡)로 무관인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경상좌수영에서 관장했던 경상좌도의 7진 가운데 서평진, 포이진과 개운진이 합설되어 영도진이 설치되었다가 이후에 폐지되었다.
변천 및 현황
개운진, 서평진, 포이진은 경상좌수영의 속진(屬鎭)이었다. 그 가운데 포이는 아주 가까운 데 있어 호흡이 서로 잘 맞았으나 3개의 진을 모두 혁파하고 영도진에 합설하였다. 이에 영도진은 꽤 견고해졌는데, 본영에 비해 강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영도진의 전선(戰船)은 3척이었는데, 이는 본영의 선척 수와 같았다. 경상좌수사이재호(李在頀)는 영도진에 합설한 3개 진 가운데 1개 진을 본영에 떼어달라고 요청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포이진을 본영에 환속시켰다(『고종실록』 27년 9월 12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