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楊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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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된 명의 장수.

개설

양원(楊元)이 맡았던 정식 관직은 부총병(副摠兵)이었다. 조선으로 파병될 때는 좌협대장의 임무를 띠고 여러 명의 부총병과 참장(參將), 유격(遊擊) 등을 통솔했다. 평양성 전투에 참전해 평양 회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1597년(선조 30) 남원성(南原城)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인솔하고 있던 병력 대부분과 여러 장수를 잃었다. 패전의 책임 때문에 탄핵되어 관직을 잃고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이후 사형에 처해졌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되었던 명군은 조승훈(祖承訓) 등이 인솔하는 요동군(遼東軍)이었다. 당시 명군은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매복 작전 때문에 크게 패했다. 이후 명에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10만 대군을 파병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592년(선조 25) 11월까지도 명군은 조선으로 출동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명에서 전쟁의 상황을 좌시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명은 조선에 대한 대규모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명에서는 병부(兵部) 시랑(侍郞) 송응창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이여송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은 43,000명 규모의 명군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동했다. 이때 양원은 좌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총병왕유익(王有翼), 왕유정(王維禎), 참장이여매(李如梅), 이여오(李如梧), 양소선(楊紹先), 선봉부총병사대수(査大受), 부총병손수렴(孫守廉), 참장이녕(李寧), 유격갈봉하(葛逢夏) 등을 인솔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12월 1일).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 양원은 조선의 요청에 따라 전라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3천의 병력을 인솔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 이에 앞서 참장낙상지(駱尙志)가 남원성을 증축했는데, 양원이 도착하여 성을 둘러보고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성 밖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이 견고해서 방어의 거점으로 보다 적합하다고 건의했지만 양원은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30년 5월 1일).

일본군은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해 남원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양원은 장수들을 지휘하면서 분전을 거듭했지만 일본군이 참호를 메우고 야간 공격을 감행하자 더 이상 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양원은 휘하 몇 사람과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하지만 남원성을 방어하던 대다수의 조선군과 명군이 전사했다. 양원은 남원성 전투의 패배 때문에 탄핵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선조수정실록』 30년 9월 1일).

명에서는 참수한 양원의 머리를 조선에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양원이 구원군이 없는 상황에서도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 조정은 유격진우충(陳愚衷)이 양원에게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원이 평양성 전투에서 세웠던 전공을 기리며 관원을 보내 따로 제사 지내도록 조치했다(『선조실록』 31년 10월 8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김경태, 「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166, 한국사연구회, 2014.
  • 손종성, 「임진왜란시 대명외교 - 청병외교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제1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이현종, 「16세기 후반기 동아(東亞)의 정세」, 『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조원래,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최소자, 「임진란시 명의 파병에 대한 논고」, 『동양사학연구』11, 동양사학회, 1977.
  • 최영희, 「임진왜란 중의 대명사대에 대하여」, 『사학연구』18, 한국사학회,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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