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나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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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백면지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전라도 나주목의 사찰.

개설

쌍계사(雙溪寺)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에 있는 폐사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금성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암군에 속하게 되었다. 쌍계사는 조선후기에 백면지(白綿紙)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사찰이다. 당시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지방 관청의 제지소(製紙所)가 쇠퇴하였고, 그에 따라 종이 제작은 주로 사찰에서 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관할 행정 구역의 변화

금성현(錦城縣) 쌍계사는 오늘날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 있는 폐사지를 말한다. 금성현은 나주목(羅州牧)의 다른 이름으로, 1645년(인조 23)에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또 이듬해인 1655년(효종 6)에 다시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64년(현종 5)에 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1895년에 나주목의 일부 지역이 영암군으로 편입되었고, 쌍계사가 영암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이다. 금정면은 조선시대에 나주군 금마면(金磨面)과 원정면(元井面) 지역이었으나 1895년에 영암군에 편입되면서 금마면의 ‘금(金)’ 자와 원정면의 ‘정(井)’ 자를 따서 금정면이라고 하였다.

(2) 창건

쌍계사는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백운(白雲) 대사가 창건하고, 1065년(고려 문종 19)에 호호(浩浩) 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하지만 문헌적 근거는 없다. 인근의 덕룡산 불회사(佛會寺)와 운흥사(雲興寺)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알려져 있으므로 쌍계사 역시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쌍계사지에는 석장승과 기둥돌 등 여러 파편들이 그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3) 조선시대

효종대에 쌍계사 불상에서 땀이 흘러내렸다는 기록이 있다(『효종실록』 10년 윤3월 20일). 당시 불상에서 땀이 나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기 때문에 지방 관아에서 조정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쌍계사에서는 백면지를 생산하여 관청에 납품했는데, 1660년경에 인조의 다섯 째 아들이었던 숭선군(崇善君)이 쌍계사 종이를 독차지한 적이 있는데(『현종실록』 1년 3월 5일), 숭선군이 왕자였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원망만 할 뿐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종이를 제작하여 관청에 납품하던 사찰이 많았다. 사찰에서 종이를 제작하던 전통은 신라시대 이래로 사찰에서 경전을 인출하는 일이 잦아지자 자체적으로 종이를 제작하면서 생겨났다. 조선전기까지는 사찰에서의 종이 제작이 자급자족 수준이었으나, 조선후기에 공물을 미곡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관청에서는 종이를 사찰에서 주로 조달하였다. 관청에서 더 이상 직접 종이를 생산하여 상납할 필요성이 사라졌고, 대신에 부족한 종이를 사찰에서 구매하여 충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찰에서는 제지업(製紙業)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였고 그에 따른 불사(佛事)들이 이어졌다. 간혹 종이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에 높은 값을 치르거나 권력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납품처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쌍계사 역시 나주목에서 백면지를 전담하여 생산하던 곳이었는데, 현종대에 절에서 납품하던 종이를 숭선군이 독차지함으로써 관청에서 종이를 구매하지 못하게 되고 제때에 상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 쌍계사가 백면지 생산의 주요 사찰이었고, 현종대에 관청에 납품하던 종이를 숭선군에게로 바꿈으로써 문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삼기,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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