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전통보(十錢通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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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대 이전에 주전한 보통 동전의 10배 가치가 있는 화폐.

개설

조선은 양란 이후 재정적인 문제를 주전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동전의 원료가 되는 구리의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전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청으로부터 동전을 수입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할 경우 오히려 조선에서 혼란이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전하려는 움직임이 효종대에 구체화되었고 원료 부족 등의 문제를 감안하여 보통 동전 액면가의 10배인 십전통보를 주전하였다. 관에서는 십전통보를 발행하여 부족한 통화량을 증가시키려고 했다.

연원 및 변천

현종대 『승정원일기』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십전통보는 효종대 이미 상평청 창고에 약 20관(貫) 곧 75㎏ 정도가 보관되어 있었다. 현종대 이전에 주전되었지만 유통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아 상평청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십전통보의 제작과 유통에 대한 언급이 정조대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십전통보는 주전이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십전통보가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정조대에 들어서이다. 정조대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널리 유통되고 있었는데 주전량이 충분하지 않아 동전 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동전의 원료가 부족하여 더 이상 주전을 확대하지 못하게 되자 고액전을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정조대 십전통보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계획되었다. 1793년(정조 17) 호조 정랑정동교(鄭東敎)는 당시 동전의 원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동전 1문을 10전의 액면가치로 유통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정조실록』 17년 12월 1일). 그러나 정조대의 십전통보도 제안에만 그치고 실제로 주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유통되고 있던 상평통보가 실질가치에 기반해서 민간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전통보는 액면가에 비해 실질가치가 현저하게 낮아 계획에만 그치고 실제 주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형태

현재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십전통보는 현종대에 주전한 것이 유일하다. 십전통보는 상평통보와 같은 형태로 둥근 외형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당시 십전통보는 원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실제 가격보다 높은 액면가를 채택하였다. 따라서 십전통보의 무게는 액면가에 해당하는 10전이 아닌 5~6전으로 제작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후기 민간에서 유통되었던 화폐는 철저하게 실질가치에 근거해서 유통되었다. 액면가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민간에서는 불법적으로 사사로이 주조한 사주전이 나타났고, 액면가보다 실질가치가 높을 경우 동전을 녹이는 훼전(毁錢)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십전통보와 같은 고액전이 민간에서 유통되기 위해서는 가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담보를 주전의 주체인 관 차원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확인할 수 없다. 그 결과 민간에서는 실질가치와 맞지 않는 십전통보의 사용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원유한, 『한국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한국은행 발권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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