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현(新昌縣)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신창현 |
한글표제 | 신창현 |
한자표제 | 新昌縣 |
상위어 | 충청도(忠凊道) |
동의어 | 굴직현(屈直縣), 기량현(祁梁縣), 온창현(溫昌縣) |
관련어 | 조전성(漕轉城)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군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폐지 시기 | 1914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창현(新昌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신창현(新昌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현이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설립되었다. 15세기에는 호수가 338호, 인구가 1,555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12명, 진군(鎭軍) 28명, 선군(船軍) 63명이었다. 토지는 3,064결인데, 논의 비중이 밭에 비하여 적었다. 1895년(고종 32)에 신창군으로 승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신창현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으며, 굴지(屈旨)라고도 불렸다.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인 탕정군(湯井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940년(신라 태조 23)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018년(신라 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임내로 두었다. 신창현은 작은 현이었지만 교통과 조운의 요지여서 독립과 병합을 반복하였다. 1391년(신라 공양왕 3)에 조전성(漕轉城)을 현의 서쪽 장포(獐浦)에 쌓았는데 당성(溏城)이라고 하였다. 부근 주현의 조세(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 이를 해상으로 조운하여 서울로 수송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4년(태종 14)에 지금의 충청남도 온양시 온양면 지역인 온수(溫水)에 합쳐서 온창현(溫昌縣)으로 고쳤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신창현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를 파견하는 지역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20명, 아전 20명, 지인 11명, 사령 9명, 관노 9명, 관비 10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행정단위는 조선후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조선후기에 행정구역은 7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편호 1,800호, 인구 7,681명으로 남자 2,656명, 여자 4,990명이었다. 토지는 밭 598결 34부 8속, 논 1,068결 67부 8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신창군으로 승격하여 홍주부의 관할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에 13도제로 환원되면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온양군과 함께 아산군에 통폐합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창현읍지(新昌縣邑誌)』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