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侍衛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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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궁궐의 시위(侍衛)를 전담하고 황제를 호위하던 부대.

개설

1894년 6월 갑오개혁 시 일본의 간섭하에 여러 군문(軍門)이 군무아문으로 일원화되었다가 훈련대(訓鍊隊)로 편성되었다. 1895년 윤5월 궁내의 시위를 전담하는 군대로 시위대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8월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훈련대 안에 편입되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으로 이후 러시아 군사교관이 시위대를 훈련 받은 군사들로 재조직하였다. 1897년 9월에는 시위대를 2개 대대로 늘려서 편성하였다. 1902년 9월 시위대를 증설하고, 10월에는 포병대대와 시위기병대대(侍衛騎兵大隊) 등을 확대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시위대를 감축하였다. 1907년 8월에는 시위대를 비롯한 지방 진위대 등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킴에 따라 시위대는 폐지되고 말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일제의 간섭하에 이전의 여러 군문을 군무아문에 소속시켜 일원화하였다. 이듬해 훈련대(訓鍊隊)로 통합하여 편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해 일제의 세력이 약해지자, 고종은 1895년 윤5월 25일 칙령 120호로 궁내의 시위를 전담하는 군대로 시위대를 신설하였다. 기존의 훈련대, 신설한 공병대·마병대 외에 따로 연병(鍊兵) 2대대로 편성하였다. 시위대의 장교는 연대장 1명 부령(副領), 대대장 2명 참령(參領), 부관 2명 부위(副尉), 향관(餉官) 2명 정위(正尉), 중대장 4명 정위(正尉), 소대장 14명 부위·참위(參尉) 등으로 구성되었다. 시위대의 봉급은 훈련대와 같은 수준으로 하였으며, 시위대의 복장도 육군 복장과 같은 것으로 하였다.

1895년 양력 10월 10일 일본의 낭인들과 수비대·훈련대 병사, 경찰이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때 궁궐을 수비하던 시위대는 이들과 두세 차례 충돌하였으나 막아내지 못하고,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여러 명의 시위대 병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이후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칙령 157호로 시위대를 훈련대로 옮겨 편입시켰다.

조직 및 역할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군제가 도입되고 군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10월부터 러시아에서 초빙한 군사교관에 의해 훈련받은 군사들로 시위대가 다시 조직되었다. 당시 5개 대대 3,30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병사 800명을 선발하였다. 1897년 3월 31일에는 러시아 교관에게 훈련 중인 병사들로 시위대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이때 4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하고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897년 9월 30일 기존의 1개 대대 외에 다시 1개 대대가 증설되어 모두 2개 대대로 늘었다. 1898년 7월 2일 칙령 22호로 친위(親衛) 가대(假隊) 편제를 개정하여 친위대를 종전 시위대의 예에 의해 마련하고 직원과 병사의 정원을 결정하였다. 8월 29일에는 시위대에 포병 1개 중대를 배속시켰다. 1899년 8월 29일에는 시위기병 1개 대대를 추가로 편제하여 400여 명의 시위기병대대가 추가되었다.

1899년 6월 22일 조칙으로 원수부를 만들면서 원수부 산하에 군무국과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 등을 설치하였다. 검사국장은 매일 시위대에 속한 장교 중 1명을 위임하여 궁성 호위병을 시찰하게 하였다.

1902년 9월 12일에는 조칙을 내려 시위대와 친위대에 각 1개 대대를 증설하였다. 또한 연대 차례를 원수부에서 다시 편제하게 하여 10월 30일 개편안이 반포되었다. 시위 연대를 2개 대대로 편성하고 시위대 1연대와 2연대 휘하에 보병인 시위대 2개 대대와 포병대 1개 대대, 별도의 시위기병대대를 편성하였다.

시위대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창설된 이래, 최초로 러시아 군제를 받아들여 편성·훈련된 정예 부대로서, 대한제국기 중앙군의 주력이 되었다.

변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1905년 4월 22일 칙령 27호로 시위 보병 제1연대 편제가 제정되어 시위대는 강제로 감축되었다. 이전의 친위대 2개 연대, 4개 대대의 4천여 병력은 폐지되었으며, 시위 2개 연대를 보병만의 1개 연대로, 포병대대와 기병대대를 각 1개 중대로 감축하였다. 포병, 기병, 공병을 포함한 시위 혼성 여단의 총병력은 연대 3개 대대 2,513명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1907년 4월에는 제2단계 재편성 조치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하는 6개의 칙령을 한꺼번에 반포하였다. 이로써 시위 보병 연대는 다시 3개 대대와 그 휘하 4개 중대 등으로 재편성되었다.

결국 시위대는 1907년 8월 1일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을 거행당하고 폐지되었다. 당시 제1대 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폭발한 시위대와 군인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해산 군인들은 대거 항일 의병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이후에는 황궁 의장(儀裝)과 수비를 임무로 하는 근위 보병대 1개 대대 644명이 편성되었다. 그해 12월에는 황실 의장을 임무로 하는 92명의 근위 기병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군부가 폐지되고 관제가 개정되며 근위 보병대와 기병대는 더욱 축소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어 군대도 모두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관보(官報)』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혜안, 2000.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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