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명지보(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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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 대한제국 시기 4품 이상 문무관의 임명장, 공신 교서, 교명 등에 사용한 행정용 어보.

개설

시명지보(施命之寶)는 주로 국왕 문서에 사용한 어보(御寶)의 한 종류이다. ‘시명(施命)’은 『주역(周易)』의 구괘(姤卦)에서 따온 말로, 바람이 하늘 아래에 두루 다니는 것과 같이 군주(君主)가 상(象)을 두루 관찰하여 명령을 베풀어서 사방을 교화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명지보 이전에 제작된 국왕신보(國王信寶)국왕행보(國王行寶)가 진나라의 승여육새(乘輿六璽)에서 문구를 취하여 제작한 반면 같은 시기에 제작된 시명지보와 소신지보(昭信之寶)는 고전에서 의미를 취한 점이 다르다. 따라서 이 어보들의 문구는 중원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 조선 고유의 보문(寶文)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명지보는 조선시대 국왕 문서에 가장 많이 사용한 어보로, 주로 지금의 사령장에 해당하는 고신(告身)에서 사용 사례를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문무관 4품 이상 고신식에서는 ‘보(寶)’를 안보(安寶)하고, 5품 이하는 ‘인(印)’을 답인하여 차등을 두었다. 후자의 경우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각각 이조지인(吏曹之印)과 병조지인(兵曹之印)을 답인하였다.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서 사용 범위를 구분하여 이러한 규정을 정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시명보는 모두 세 차례 제작되었다. 1443년(세종 25) 국왕행보의 사용을 폐지하고 이를 대신하여 제작한 ‘시명지보’는 조선 왕조에서 제작한 최초의 시명보이다(『세종실록』 25년 10월 2일). 시명지보를 안보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는 「능성쌍봉사면역사패교지(綾城雙峰寺免役賜牌敎旨)」가 있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능성쌍봉사면역사패교지」는 1457년(세조 3) 8월 세조가 전라도 능성에 있는 쌍봉사에 잡역을 면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로, 감사와 수령은 전에 내린 전지에 의거하여 쌍봉사를 잘 살펴 보호하고 잡역을 감면하라는 내용이다. 조선전기 사패교지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로, 세조의 어압(御押)과 함께 1443년에 제작한 시명보의 안보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안보의 위치는 연호인 ‘천순’과 연(年)인 ‘원년’ 사이에 두었다.

1466년(세조 12) 새로운 시명보를 사용하면서 시명지보는 폐지되었다. 보문은 ‘시명(施命)’ 두 글자를 새겼는데, 훗날 새 시명보를 ‘시명소보(施命小寶)’ 또는 ‘시명옥보(施命玉寶)’로 칭하였다. 후대의 기록에는 새로 바꾼 이유에 대해 관제를 바꾸면서 비로소 썼거나, 일기를 상고하여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제작한 시명보의 사용 사례로는 장말손(張末孫)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적개공신장말손상훈교서(敵愾功臣張末孫賞勳敎書)」 1축이 있다. 「적개공신장말손상훈교서」는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수훈을 세운 45명의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로, 장말손은 2등 공신으로 선정되어 적개공신의 교서를 받았다. 적개공신 관련 문헌인 『적개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도 같이 보존되어 왔으나 불에 타서 일부가 훼손되고 45명의 적개공신에게 내린 교서 가운데 유일하게 이 교서만 전한다. 공신들 전원의 이름을 적었고, ‘시명’이라는 왕의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두 번째 시명보는 1466년 1월 10일부터 1493년 3월 28일까지 27년 2개월 18일 동안 사용하였다.

1493년(성종 24) 성종은 당시 대보(大寶)와 시명보의 사용 범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규정을 마련하였다. 내용은 기존의 관리 임명과 해임에 관한 문서인 정비(政批)와, 2품 이상의 사령장인 관교(官敎)에 시명보를 쓰고, 토전(土田)이나 장획(臧獲)을 하사할 때 대보를 사용함은 일의 경중에 어긋나므로, 3월 28일부터 정비와 관교를 제외한 일체의 사패는 모두 1443년에 제작한 ‘시명지보’를 쓰도록 하였다.

약 3개월 뒤인 7월 3일 성종은 다시 어보 사용에 따른 기존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책을 승정원으로 하여금 상의하도록 하였다. 문제점은 첫째, 대보의 사용 빈도에 비해 금의 성질로 인하여 쉽게 마모될 우려가 있고, 둘째, 사용 중인 시명보(시명옥보)의 크기가 대보보다 작아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신들이 내놓은 대책은 기존의 방식대로 사용하자는 쪽과 사용 범위를 수정하자는 의견으로 갈리었고, 새로운 어보를 제작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성종은 1443년 제작한 시명지보의 크기가 대보보다 크게 제작된 점을 들어, 주석에 도금을 하고 곡전문(曲篆文: 첩전(疊篆)으로 새로운 ‘시명지보’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용도는 이전에 시명보를 쓰던 문서에 신보(新寶)를 쓰는 것으로 하고, 이를 중외(中外)에 알리도록 하였다.

왕명이 있은 지 3일 후 도승지김응기(金應箕)는 세종 대에 제작한 시명지보는 국내에서만 사용하면 문제가 없으므로 신보를 제작할 필요가 없음을 거듭 아뢰었고, 신주의 몇 가지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우선 인장에 ‘보’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자뿐인데, 왜인(倭人)이나 야인(野人)이 명에 왕래하다가 조선에서 ‘보’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보’는 귀한 물건인데 주석으로 만들면 가볍고 천하니 이왕 만들려면 금은이나 옥으로 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성종은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어보에 대해 거듭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때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이 2명이었고, 만들 필요가 없다거나 둘 다 무방하다는 의견이 5명으로, 주로 만들지 않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성종은 무슨 까닭인지 새로운 어보의 제작을 종용하였다. 3일 전 명령과 달라진 점은 신보의 재질이 주석 도금에서 은제 도금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김응기의 의견이 일부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신주에 대한 왕명이 있고 난 2개월 24일 만에 세 번째 시명지보가 완성되었다. 사용 범위는 정비와 관교, 왜인과 야인에게 내리는 관교와 모든 사패로, 사대문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왕 문서에 쓰도록 하였다. 이로써 대보 사용이 줄어들어 마모될 우려가 없었고, 크기도 대보와 같게 하여 국새 대용의 어보로서 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왜인과 야인의 관교에 시명보를 씀으로써 조선에서 ‘보’자를 사용하는 사실이 명에 알려질 수 있다는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셈이다.

이 시점부터 국새인 ‘조선국왕지인’은 사대문서에만 사용하였고, 작상(爵賞)과 관련한 일체의 국왕 문서에 시명보를 사용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1897년(광무 1) 9월 9일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황제의 지위에 걸맞게 새로운 국새와 어보를 제작하였다. 조성 과정과 절차에 대해서는 『대례의궤(大禮儀軌)』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갑오개혁 이후 사령장인 고신이 칙명으로 대체되면서 어보 또한 시명보를 대신하여 칙명지보(勅命之寶)로 대체되었다.

형태

1443년 제작된 첫 번째 시명보는 주문방인으로 사방 10.4㎝ 크기이다. 1401년(태종 1) 6월, 명으로부터 받은 국새인 ‘조선국왕지인’보다 약 5㎜ 크게 제작되었다. 서체는 첩전으로 종전의 새보(璽寶)에서 9획을 정확히 지키던 방식과 달리 13첩으로 4첩을 더하였다. 이는 1445년(세종 27) 강희안(姜希顔)의 전문으로 제작한 소신지보와 같은 첩수이다.

1466년 제작된 두 번째 시명보는 주문방인으로 사방 8.8㎝ 크기이다. 1443년에 제작하여 약 23년간 사용한 시명지보보다 1.6㎝ 작다. 서체는 종전의 어보들이 첩전을 사용한 데 비해 소전으로 하였고, 재질도 금을 비롯한 금속성 물질로 제작하지 않고 옥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1493년 제작된 세 번째 시명보는 주문방인으로 크기는 사방 10㎝이다. 1466년에 제작하여 약 17년간 사용한 시명보보다 1.2㎝ 크다. 서체는 구첩전으로 하였고, 은제(銀製) 도금이다.

참고문헌

  • 『주역(周易)』
  • 『대례의궤(大禮儀軌)』
  • 국립전주박물관 편, 『대한제국기 고문서』, 2003.
  • 정구복, 「조선조의 고신(사령장) 검토」, 『고문서연구』9,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