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홍씨(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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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7년(세조 3)~1510년(중종 5) = 54세]. 조선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홍일동(洪逸童)이며, 어머니는 사정(司正)문유질(文由質)의 딸인 남평 문씨(南平文氏)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홍상직(洪尙直)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밀직사(密直司) 판사(判事)를 지낸 홍징(洪徵)이다. 홍길동(洪吉童)이 서얼 숙부이기도 하다. 성종과의 사이에 7남 3녀를 두었는데, 완원군(完原君)이수(李𢢝), 회산군(檜山君)이염(李恬), 견성군(甄城君)이돈(李惇), 익양군(益陽君)이회(李懷), 경명군(景明君)이침(李忱), 운천군(雲川君)이인(李◎忄+寅 인), 양원군(楊原君)이희(李憘), 혜숙옹주(惠淑翁主), 정순옹주(靜順翁主), 정숙옹주(靜淑翁主)이다.

성종의 후궁

홍숙의(洪淑儀)는 중추부 동지사를 지낸 아버지 홍일동(洪逸童)과 문유질(文由質)의 딸인 어머니 남평 문씨(南平文氏)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성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성종실록(成宗實錄)』 14년 6월 12일),(『성종실록』 21년 4월 27일) 이후 숙용(淑容)으로 진봉되었다.[『성종실록』성종대왕 묘지문]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소용(昭容)에 봉해졌는데, 홍숙의의 아들인 완원군이수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는 바람에(『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4월 1일) 어머니인 홍숙의는 규례대로 연좌되어 작위(爵位)를 추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4월 27일) 이때 연산군은 처음에는 홍숙의의 작위를 추탈하는 대신에 소용에서 숙용으로 강등시켰으나,(『연산군일기』 11년 5월 7일) 결국 홍숙의의 직첩을 빼앗고 궁에서 내쫓았다.(『중종실록(中宗實錄)』 1년 9월 2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홍숙의의 숙의(淑儀) 직첩을 다시 돌려주고 자수궁(慈壽宮)에 들어와 생활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

묘소와 후손

홍숙의의 무덤은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에 있다. 묘표는 묘역의 입구에 있으며, 묘갈(墓碣)은 비좌와 대리석으로 조성된 비신,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데, 이수(螭首)는 용(龍)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홍숙의는 성종과의 사이에서 7남 3녀를 낳았는데, 1자인 완원군이수는 생원(生員)으로 찬성(贊成)에 증직된 최하림(崔河臨)의 딸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전주 최씨(全州崔氏)와 결혼하여 1녀를 낳았다. 그리고 별좌(別坐)로 찬성에 증직된 허적의 딸인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양천 허씨(陽川許氏)와 재혼하여, 사이에 2남 2녀를 낳았다. 2자인 회산군이염은 찬의(贊儀)로 찬성에 증직된 안방언(安邦彦)의 딸인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죽산 안씨(竹山安氏)와 결혼하였는데, 사이에 1녀만 두어 동생인 견성군의 차남 계산군(桂山君)이수계(李壽誡)를 양자로 들였다. 3자인 견성군이돈은 신우호(申友灝)의 딸인 영양군부인(永陽郡夫人)평산 신씨(平山申氏)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4자인 익양군이회는 정문창(鄭文昌)의 딸인 순천군부인(順川郡夫人)영일 정씨(迎日鄭氏)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았으며, 최세윤(崔世潤)의 딸인 화순 최씨(和順崔氏)를 측실로 들여서는 2남을 두었다. 5자인 경명군이침은 첨정(僉正)윤첩(尹堞)의 딸인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파평 윤씨(坡平尹氏)와 결혼하여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6자인 운천군이인은 권인손(權仁孫)의 딸인 학성군부인(鶴城郡夫人)안동 권씨(安東權氏)와 결혼하여 사이에 4녀를 두어서 완원군(完原君)의 차남 이천군(伊川君)이수례(李壽禮)를 양자로 들였다. 7자인 양원군이희는 조경(趙經)의 딸인 문천군부인(文川郡夫人)풍양 조씨(豊壤趙氏)와 결혼하였는데 슬하에 자녀는 없다. 양근군부인(楊根郡夫人)문화 유씨(文化柳氏)와 재혼하여 1남을 두었고, 양첩(良妾) 학정(鶴貞)과의 사이에 3남 8녀를 두었다.

1녀인 혜숙옹주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예조 참판(參判)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고원위(高原尉)신항(申沆)과 결혼하였는데,(『성종실록』 21년 4월 27일)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여 신수경(申秀涇)을 양자로 들였다. 2녀 정순옹주는 봉화 정씨(奉化鄭氏)주부(主簿)정현(鄭礥)의 아들인 봉성위(奉城尉)정원준(鄭元俊)과 결혼하여 1남을 두었다. 3녀 정숙옹주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윤승유(尹承柳)의 아들인 영평위(鈴平尉)윤섭(尹燮)과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