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산성(首陽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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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수양산성 |
| 한글표제 | 수양산성 |
| 한자표제 | 首陽山城 |
| 상위어 | 관방(關防) |
| 관련어 | 강도(江都), 요해처(要害處) |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 유형 | 건축 |
| 지역 | 대한민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조선 |
| 집필자 | 김순남 |
| 장소 | 황해도 해주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수양산성(首陽山城) |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 『정조실록』 2년 1월 10일, 『선조실록』 38년 2월 23일 | |
황해도 해주수양산에 축조한 성.
개설
수양산성이 있는 해주의 수양산은 강화도 방어의 요해처였다.
위치 및 용도
황해도 해주시 북쪽 수양산에 있으며, 3면이 깎아지른 절벽인 데다 남쪽의 한 면은 평평한 듯하여 군사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었다. 해주의 성과도 가까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와 같은 지세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에 수양산성은 왜적들로부터 강도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수양산성은 무너진 곳이 하나도 없었고, 관사와 창고, 보관하던 무기 등이 모두 온전하였다. 황해도 내에서 형세가 험하기로는 제일인 이곳은 강도를 지키기에 최적지였다.
변천 및 현황
1596년(선조 29) 3월 보수했다. 1778년(정조 2) 1월 당시 수양산성 내의 전결(田結)이 76부(負)였다(『정조실록』 2년 1월 10일).
형태
성안에 있는 은적사(隱迹寺)는 수백 명의 승려를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였다고 하여 당시 성의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선조실록』 38년 2월 2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