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孫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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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1594년 7월부터 1597년 3월까지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한 명의 관리.

개설

손광은 고양겸(顧養謙)이 1594년 5월에 탄핵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자 그를 대신해 경략부를 지휘했다. 당시 관직은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다. 전임자였던 고양겸은 일본의 봉공(封貢)을 허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동시에 이를 실행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략직을 맡기 전의 손광은 고양겸과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처음 그는 명의 예부(禮部)·과도관(科道官)과 함께 일본의 조공을 허락하는 문제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조공을 허락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상서(尙書)석성(石星)과의 사이가 순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군을 제압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 역시 일본과의 강화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광도 탄핵을 받아 경략직에서 파직되었다.

활동 사항

경략송응창(宋應昌)은 1593년(선조 26) 12월에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났고, 계요보정총독(薊遼保定總督)고양겸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경략직을 수행하게 된 고양겸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당시 명에서는 산동(山東)·하남(河南)·대강(大江) 이북 지역에서 기근과 흉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고양겸 역시 전임자의 방안을 따라 강화교섭으로 조선의 전쟁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양겸 등이 일본의 봉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 조정 내부에는 큰 논란이 있었다. 당시 고양겸과 이여송 등 5~6인의 대신과 호부(戶部)·병부(兵部)는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반면 과도관들은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일본의 봉공을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만력제(萬曆帝)는 망설이면서 일본에 대한 책봉과 조공의 승인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조실록』 27년 6월 7일). 고양겸 등에 대한 명 조정의 탄핵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조치였다.

결국 고양겸 역시 명의 과도관들의 거듭된 탄핵 때문에 경략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명 조정에서는 고양겸에게 경략부에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제의했고, 그의 후임으로 병부우시랑손광을 임명했다. 당시 명의 잦은 경략 교체로 인해, 명 측에서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은 물론 외교적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명군의 일부가 완전히 철수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1594년(선조 27년) 정월 명의 강요로 설치된 분조(分朝)의 해체를 요구해 뜻을 관철시켰다. 이후 이원화되었던 조선의 정치구조나 일본군에 대한 대응체계를 국왕 중심으로 일원화했다.

손광은 고양겸의 후임으로 경략부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명군의 상황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본국의 추가 지원 여부도 확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는 무력 수단을 확보하고 있지도 못했다. 따라서 손광 역시 고양겸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명에 대한 조공을 성사시켜 강화를 맺으면서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일본의 봉공을 강하게 반대했던 태도가 경략직을 수행하면서 점차 변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본국으로부터 군량과 증원군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손광은 일본군 장수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폐물(幣物)을 보내면서 군사를 철수시키도록 권하기도 했다(『선조수정실록』 28년 3월 1일). 하지만 일본이 명에 조공하도록 하는 일은 실패했고, 만력제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양방형(楊方亨) 등의 역할에 분노했다. 당시 양방형은 모든 일을 석성과 손광의 책임으로 돌렸다. 양방형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던 만력제는 두 사람을 파직했다(『선조실록』 30년 4월 11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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