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사(稅務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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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세무사 |
한글표제 | 세무사 |
한자표제 | 稅務司 |
상위어 | 총세무사(總稅務司), 해관(海關), 관세(關稅), 개항장(開港場), 서양인(西洋人),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탁지부(度支部), 개화정책(開化政策) |
하위어 | 방판(幫辦), 험화(驗貨), 영자수(鈴字手), 이선청(理船廳), 기기사(器機司), 통역(通譯), 서기(書記) |
동의어 | 세관장(稅關長) |
관련어 | 세관(稅關), 수세(收稅), 세관(稅關) 관제(官制)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기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은정태 |
폐지 시기 | 1907년(순종 1) 12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세무사(稅務司) |
개항장에 설치된 관아인 해관(海關)을 지휘·관리하던 관직.
개설
세무사는 1883년(고종 20) 11월 관세(關稅)를 관장하기 위해 각 개항장에 설치된 해관의 책임자로 서울에 있는 총세무사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대체로 청국 해관에 근무하다가 조선 해관으로 옮긴 인물로, 근무가 끝나면 다시 청국 해관에 복귀하였다. 세무사는 대부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양인들이었다. 1907년 12월 해관이 세관(稅關)으로 바뀌면서 각 개항장의 세관 책임자는 세관장으로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1880년대 각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개화·자강 정책을 추진하였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와 임오군란 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설치는 대외 개방에 따른 정부 차원의 제도적 정비 조치였다. 강화도 조약으로 약속된 개항장의 마련은, 부산을 제외하고 미정이었던 두 곳이 1880년대 들어 한일 간 협상 끝에 인천과 원산으로 결정되었다. 인천의 경우 임오군란으로 지연되기는 했지만, 1883년 1월 개항 기일이 정해졌다.
한편, 조선은 1882년부터 미국을 필두로 서양 각국과도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고, 청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각국과의 통상 조약에 관세 규정이 있었고, 이에 조선 정부는 1883년 4월 각국과의 무역 통상에서의 관세를 수취할 기관으로 해관을 설치하였다. 이를 위해 청국의 추천을 받아 묄렌도르프([穆麟德], Mṏllendorf, P. G. von)를 고용하여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임명하였고, 이해 11월부터 수세(收稅) 업무를 개시하였다.
조직 및 역할
개항기 해관은 중앙 관세 행정 기관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총세무사가, 지방의 관세 행정 기관으로 감리(監理)와 세무사가 있었다. 해관의 책임자인 총세무사는 통리아문에서 지휘·감독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해관 운영의 책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세무사는 감리를 보필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였다.
1883년에 서울 총해관과 부산·인천·원산 해관이 차례로 개설되었다. 해관에는 책임자인 세무사 아래에 방판(幫辦), 험화(驗貨), 영자수(鈴字手), 이선청(理船廳), 기기사(器機司), 통역, 서기가 임명되었다. 물론 개항장마다 그 인원수는 달랐다. 세무사는 총세무사의 지휘를 받아 이들을 총괄하였다.
해관 조직은 1885년 이후 변화가 생겨 내반(內班)과 외반(外班)으로 구분하였다. 내반은 방판, 서기, 녹사(綠事), 의원, 통사로 구성되어 관세에 대한 회계, 통계, 보고, 서무 등을 담당하였다. 외반은 험화, 영자수, 험화 보조원 칭화(稱貨), 선원과 잡역 등으로 구성되어 주로 화물 검사, 선박의 임검(臨檢) 감시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해관 창설 당시 총세무사의 임면권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1885년 이후 조선 해관이 청국의 실질적 간섭 아래 있게 되면서 조선 해관의 임면권도 청국 해관의 총세무사인 하트(Hart, R.)와 북양대신(北洋大臣)이홍장(李鴻章)이 행사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각 해관 세무사는 인사권을 갖고 있는 총세무사와 강력한 위계 구조 아래에 있었다. 이들은 청국 해관의 소속이기도 하여 청국 해관에서 월급을 받았다. 또 청국 해관의 총세무사의 추천과 조선 해관의 총세무사의 동의하에 청국 해관에서 조선 해관으로 전임하여 온 처지였다. 그래서 총세무사가 교체되면 세무사도 함께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세무사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모두 서양인들로서 조선 해관에 근무한 후 다시 청국 해관으로 돌아갈 필요도 있었다. 일부 세무사의 경우에는 1880년대 해관의 말단 관리로 왔다가 여러 해관을 전전한 끝에 1890년대 세무사로 승진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 해관과 청국 해관의 연계로 인하여 총세무사-세무사는 수직적인 위계 구조였다.
해관은 형식상 1894년 이전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그 이후에는 탁지부(度支部)에 예속된 관서였지만 정부의 통제력이 잘 미치지 못했다. 대외 통상 사무를 전담하는 해관의 관세 행정에 관한 제반 규칙과 훈령은 형식상 총세무사가 통리아문의 동의를 거쳐 시행하였을 뿐이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총세무사의 보고에 따라 지휘하는 정도였다. 해관원의 인사권에 대해서도 형식상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동의를 구해 인선하였을 뿐, 외국인 해관원에 대해서는 총세무사가 임면권을 가지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한국인 해관원에 관한 임면권만 가졌다.
변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외부(外部)로 개칭되면서 해관은 관제상 탁지부에 속하게 되었다. 탁지부 사세국(司稅局)은 세관의 감독과 수출입 상황 조사 등을 관장하였다. 이에 총세무사는 관세의 관리와 운용에 대해서는 탁지부의 명령에 의해 일정한 영향을 받았으나 관세 행정에 관한 제반 훈령은 여전히 외부의 동의를 거쳐 독자적으로 시행하였다. 세무사도 중앙과 마찬가지로 독립 아문으로 총세무사의 지휘를 받는 구조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특히 1893년부터 1905년까지 5대 총세무사로 있었던 브라운([柏卓安], Brown, J. M.)은 조선 해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93년에 임명되었으나 청일전쟁 후에는 조선 정부로부터 해관원들에 대한 인사권, 행정권, 임금 조정권 등의 재정권, 제도 개선 권한, 향후 개설될 해관에 대한 감독권, 관세 처분권까지 위임받았다. 특히 총세무사가 관세 수입을 자신의 명의로 일본 제일 은행에 예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1896년부터 1898년까지 3년 동안은 적지 않은 관세가 국고로 들어왔으나 그 이후로는 관세 수입이 미미하였다.
1902년 초 해관의 관원 수는 모두 89명으로 서양인 19명, 일본인 31명, 청국인 10명, 한국인 29명이었다. 8개 개항지의 세무사는 서양인이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목포, 마산의 6명, 일본인이 군산, 성진의 2명으로 청국인과 한국인은 거의 하급직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해관이 존속했던 1883년부터 1907년까지 외국인 해관원은 대략 1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조선 해관을 움직인 운영 주체는 총세무사를 포함한 20명 정도의 세무사였고, 대부분 서양인이었다.
한편, 1904년 8월 ‘외국인 고문 용빙 계약’에 따라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 고문으로 취임하자 해관 총세무사브라운은 사임 압력을 받았다. 결국 1905년 11월 해관의 전권을 재정 고문에게 넘겨주고 브라운은 사임하였다. 이후 다른 세무사와 함께 청국 해관으로 돌아갔다.
1907년 12월 통감부는 해관을 없애고 세관 관제를 마련하였으며, 이에 따라 세무사는 세관장(稅關長)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1880년대 이래 각국과의 통상 조약 체결에 따라 관세 수입을 통해 개화·자강을 이루려던 정책 추진은 좌절되었다. 이후 모든 세관에는 서양인 세무사 대신에 일본인 세관장이 자리하였다.
참고문헌
- 김순덕, 「1876~1905년 관세 정책과 관세의 운용」, 『한국사론』15, 1986.
- 김현숙, 「한말 고문관 J. McLeavy Brown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66, 1988.
- 부정애, 「조선 해관의 창설 경위」, 『한국사론』1, 1973.
- 윤광운·김재승, 「구한말 개항기 조선 해관에 관한 연구: 고빙 외국인 해관원의 임면과 근무 상황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연구』제10권 제2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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