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준(成文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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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9년(명종14)∼1626년(인조4) = 68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심(仲深), 호는 영동(永同) · 창랑(滄浪)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파주(坡州)인데, 한때 임천(林川)에서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우계(牛溪)성혼(成渾)이고, 어머니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첨정(僉正)신여량(申汝樑)의 딸이자 좌의정신용개(申用漑)의 손녀다.

선조 시대 당파 싸움

1585년(선조18)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진사시(進士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27세였다. 그는 경기도 파산(坡山: 파주)우계(牛溪) 서당에서 아버지 성혼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 · 중봉(重峯)조헌(趙憲)과 같은 아버지의 문하생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연은전(延恩殿)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우계성혼은 율곡(栗谷)이이(李珥)와 평생지기(平生知己) 사이였는데, 이이가 이조 판서였을 때 성혼을 이조 참판으로 천거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선조7) 이이가 죽자, 성혼은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동인(東人)의 공격과 무함을 당하였다.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자 아버지 성혼이 이조 판서가 되었고 그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가 되었다. 1590년(선조23)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우의정정철(鄭澈)이 정적 최영경(崔永慶)을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시켜 죽이자 동인과 북인의 비난이 정철과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북인 정인홍(鄭仁弘)은 최영경과 함께 남명(南冥)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기 때문에 가장 극렬하게 비난하였다. 성문준은 정인홍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정철과 성혼의 관계를 분리시켜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성문준은 1598년(선조31) 아버지 성혼이 죽은 다음에 아버지의 서간문을 정리하다가 성혼이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는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명하려고 보낸 편지의 초안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서인들이 분노하였는데, 김장생은 그를 불러다가 엄하게 꾸짖었다.

광해군 · 인조 시대 활동

광해군 시대에 북인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충청도 임천(林泉)으로 옮겨가 14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자, 사포서(司圃署)사포(司圃)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글을 올려서 사양하였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조에서 학행이 있는 유생으로 그를 천거하였으므로, 그는 영동현감(永同縣監)에 임명되었다. 임기 2년을 채우고 고향 파주 우계로 돌아와서, 1626년(인조4) 1월 26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 그는 박학다식한 학자로서 『태극변(太極辨)』, 『홍범의(洪範義)』, 『창랑집(滄浪集)』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글씨도 잘 썼다.

성품과 일화

성문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돈후(敦厚)하고 욕심이 적었다. 또한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고, 가정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받아서 항상 행동이 독실했던 데다가 문장도 잘 지었으므로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10여 세 때에 지은 시를 율곡이이가 보고 글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자라면서 책을 골똘히 읽다가 병이 나기까지 하였으나, 잠시도 쉬지 않고 공부하여 마침내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성문준은 아버지 성혼이 무고를 당한 것을 항상 애통하게 여겼는데 이와 관련해 몇몇 일화가 있다. 하루는 집안에 묵은 서간문을 들추어 보다가, 아버지가 집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찰들 중에서 우연히 병화(兵火)를 피한 옛날 편지들을 찾아냈다. 그 낡은 편지에서 아버지 성혼이 최영경의 죽음에 대해 통탄해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연루된 정언신(鄭彦信) 등의 죽음까지도 놀라워하고 애통해 하였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 1589년(선조22) 이후에 정철이 북인 정인홍 등에게 모함을 당하여, 그 여파가 아버지 성혼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성문준은 아버지 성혼에게 미칠 화를 줄이려고 정철과 성혼을 서로 분리시켜서 동인들의 원망이 전적으로 정철에게 돌아가게 하려고 하였다는 일화가 『사계전서(沙溪全書)』에 전한다. 『송자대전(宋子大全)』의 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성문준은 일부러 정인홍과 친분을 쌓아가면 아버지 성혼에게 미칠 화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김장생은 그의 처신함이 매우 분명치 못하다고 분개하여 불러서 매우 엄하게 꾸짖었고, 또 사람을 시켜 간절하게 충고하게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사당동(社堂洞)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주부(主簿)조감(趙堪)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조감은 휴암(休菴)백인걸(白仁傑)의 사위인데, 백인걸은 성혼과 이이의 스승이다. 조감은 성혼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축록(己丑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