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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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晉)나라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역사서.

개설

『삼국지(三國志)』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으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저자 진수는 무제(武帝, 재위 265~290)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분지와 한중분지 일대)의 역사인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이나,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문집(文集)인 『제갈량집(諸葛亮集)』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위(魏), 촉(蜀), 오(吳) 삼국(三國)의 역사를 깊이 탐구하여, 기전체(紀傳體)의 『삼국지(三國志)』 65편(篇)을 완성하였다.

서지 사항

68권 4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5.4cm, 가로 17.5cm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자(字)가 승조(承祚)이며, 촉한(蜀漢, 221~263)의 파서군(巴西郡) 안한(安漢, 지금의 四川省 南充) 출신이다. 촉한(蜀漢)의 장수(將帥) 진식(陳式)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다. 초주(譙周, 201~270)를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으며, 촉한(蜀漢)에서 관각령사(觀閣令史)의 벼슬에 올랐다. 하지만 후주(後主) 유선(劉禪, 재위 223~263) 시기에 권세를 누리던 환관(宦官) 황호(黃皓)에게 거스르다 쫓겨났다.

촉한(蜀漢)이 멸망한 뒤, 진수(陳壽)는 서진(西晋, 265~316)에서 사공(司空)장화(張華, 232~300)에게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다시 관직(官職)에 올라 저작랑(著作郞) 등을 역임하였다.

이 책은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 『제기(帝紀)』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 『열전(列傳)』의 체제를 취했으므로,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하다가, 촉한이 멸망한 뒤 위나라의 조(祚)를 이은 진나라로 가서 저작랑(著作郞)이 되었으므로, 자연 위나라의 역사를 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촉한을 정통으로 한 사서(史書)도 나타났다. 그러나 찬술한 내용은 매우 근엄하고 간결하여 정사 중의 명저(名著)라 일컬어진다. 다만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하여, 누락된 것이 많았으므로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南朝) 송(宋)의 문제(文帝, 407~453)는 429년에 배송지(裵松之, 372-451)에게 명하여 주(註)를 달게 하였다.

『삼국지』에 합각(合刻)되어 있는 배송지의 주(裵松之註)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기보다는 누락된 사실을 수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을 비롯한 하후담(夏侯湛)의 『위서(魏書)』 이하 당시의 사서와 제가(諸家)의 계보(系譜)ㆍ별전(別傳)ㆍ문집(文集) 등 140여 종의 인용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제서(諸書)는 그 후 태반이 산일(散逸)되었는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이 당시의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어환의 『위략』은 특히 귀중한 사료가 많이 있어, 이것을 배송지가 인용한 주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일문(逸文)을 추가하여, 청(淸)나라 때 장붕일(張鵬一)이 『위략집본(魏略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

『삼국지』는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당대에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던 하후담(夏侯湛, 243~291)은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 감탄하며, 자신이 저술한 『위서(魏書)』를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장화(張華)도 진(晋) 역사의 편찬도 진수에게 맡겨야 할 것이라며, 감탄하였다. 결국 『삼국지』는 진수 개인이 편찬한 사서(史書)이지만, 무제(武帝)의 뒤를 이은 혜제(恵帝, 재위 290~306) 때에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사(正史)로 인정되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사료(史料)들을 매우 엄격하게 선별하여 다루었으며, 문장도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정치, 경제 등의 사실만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과 관련된 인물들이나 주변의 국가나 민족들과 관련된 사실들도 폭넓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위(魏)의 선양(禪讓)을 받아 세워진 서진(西晋)에서 벼슬을 했기 때문에 위(魏)를 정통(正統)으로 해서 『삼국지』를 서술하였다. 하지만 위(魏)를 정통으로 한 다른 사서(史書)들은 『위서(魏書)』 등의 제목 아래 촉한(蜀漢)과 오(呉)의 역사를 다루었지만, 진수는 제목도 『삼국지』로 하고, 본문도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呉書)’로 나누어 삼국(三國)을 상대적으로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진수(陳壽)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의 관직까지 올랐지만, 모친(母親)이 뤄양[洛陽]에서 죽자 유언(遺言)에 따라 그 곳에 장례를 치렀다가, 불효자(不孝子)라는 비난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故鄕)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당시의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다시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의 직위를 제수(除授) 받았지만, 명(命)을 따르지 못하고 죽었다.

의의와 평가

진수의 『삼국지』는 역사서로 위(魏)를 정통으로 하여 위서(魏書) 무제조(武帝操)로부터 시작하여 오서(吳書) 화핵(華覈)까지의 인물 전기를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명나라때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재편집된 역사소설이 『삼국연의(三國演義)』이다. 나관중은 『삼국지』의 역사적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허구적 내용을 가미하여, 진수와는 달리 촉(蜀)을 정통으로 한 소설을 편찬해 내었으며, 이 소설은 중국의 고대사를 소재로 하는 고전 소설 중 가장 사랑받는 역사소설이 되었다.

또한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ㆍ고구려ㆍ동옥저(東沃沮)ㆍ읍루(挹婁)ㆍ예(濊)ㆍ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ㆍ왜인(倭人) 등의 전(傳)이 있어, 동방 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유일한 사료가 된다. 『삼국지』에 관하여는 후세에 많은 참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청나라 전대소(錢大昭)가 엮은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 3권과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 30권 및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 등이 저명하다.

참고문헌

  • 권인한, 「『삼국지』ㆍ위서ㆍ동이전의 고유명사 표기자 분석」, 『구결연구』 제27집, 구결학회, 2011.
  • 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譯註) 一』, 국사편찬위원회, 1987.
  • 박영철, 「『三國志』와 삼국시대의 정통론에 대해서」, 『역사문화연구』 제38집,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2011.
  • 이소동, 「《삼국지》 소자(所字) 구조 연구」, 『중국문화연구』 제18집, 중국문화연구학회, 2011.
  • 홍윤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및 배송지(裴松之) 주(注)에 대한 주석과 번역 1」, 『중국어문논총』 49권, 중국어문연구회, 2011.
  • 홍윤기, 「《삼국지ㆍ위서ㆍ무제기》 및 배송지 주에 대한 주석과 번역 2」, 『중국어문논총』 제50집, 중국어문연구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