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험(符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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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내외에 출입하는 사신이나 도성에 출입하는 성문지기 등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던 증표.

개설

부험(符驗)은 고대 중국에서 중앙의 명령을 전할 때 기밀 유지를 위해 만든 부(符)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하나의 물건을 둘로 나눠 가졌다가 맞춰봄으로써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였다. 고려 때 처음 도입되었으며 조선에서는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이 신분 확인을 위해 지니고 갔다. 일본 왕이나 유구국(琉球國: 현 일본 오키나와) 왕에게도 미리 지급하여 그들이 보낸 공식 사절인지를 확인하는 데도 사용했다. 조선중기 이후에 도성 문을 지키는 금군(禁軍)호군(護軍) 등에게도 지급하여 문을 열거나 닫는 것을 보류할 때 궁중에서 보낸 것과 대조하고 처리하도록 했다.

연원 및 변천

부험은 고대 중국에서 중앙의 명령을 지방으로 전달하면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부 제도를 그 기원으로 한다. ‘부’란 신표, 증표의 뜻인데, 하나의 물건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가진 뒤 서로 맞추어봄으로써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하는 장치다. 처음에는 옥(玉) 등을 재료로 삼았다가 한나라 때 대나무와 구리로 죽사부(竹使符), 동호부(銅虎符) 등을 만들면서 체계화되어 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당나라 초엽에 죽사부는 폐지되고 동호부 제도는 형태만 바뀐 채 그대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군 지휘관들에게 발급되어 임무 교대나 병력 동원 및 군사 작전 시에 서로를 확인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지닌 것을 가리켰다. 아울러 일본 왕이나 유구국 왕에게 미리 보내주어서 공식적인 사절임을 입증하는 징표로도 사용하였다(『성종실록』 5년 12월 15일).

군대 지휘관들에게는 발병부(發兵符)를 지급했으며 도성 문을 열 때에는 개문좌부(開門左符)를, 궁성 문을 열 때에는 표신을 썼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부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중종 때에도 도성 문의 열고 닫는 것을 보류시킬 때 부험을 사용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기도 했다(『중종실록』 20년 3월 6일). 그러나 부험은 『경국대전』 등 법전에 규정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사용하던 부험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명나라가 보내준 7부(部)의 부험이었다. 고려에 이어 조선까지 사용하며 3부를 잃어버려 1630년(인조 8)에는 4부만 남았다. 이에 만약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잃어버린 3부를 더 보내달라고 명나라에 요청하기도 했다(『인조실록』 8년 7월 14일). 하지만 이들은 병자호란 이후에 사실상 쓸모없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처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관하였다.

한편 도성 문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는 부험은 『속대전』에 비로소 그 규정이 보인다. 성문을 지키는 금군 2명이 모두 자리를 비웠을 경우 장(杖) 60대, 도(徒) 1년에 처하고 1명이면 장 80대에 처했다. 부험을 받은 호군이 숙직을 비웠을 때에는 두 사람이 모두 자리를 비웠을 때의 죄와 동일하게 처벌했다.

정조 때에는 성문 여닫는 것이 무질서해졌다며 고례(古例)에 의거해 재차 엄히 단속하게 했다. 도성 4대문(大門)은 선전관 1명이 선전표신(宣傳標信)을, 금군 1명이 해당 문의 해당 경(更)의 부험을, 다른 선전관 1명이 개문표신을 가지고 가되, 먼저 개문표신에 의거하여 궐문을 연 뒤에 선전표신과 부험을 가지고 간 자가 입회하여 성문에 이르러 자물쇠를 열게 했다. 4대문 사이에 있는 간문(間門)은 단지 개문표신에 의거하여 열도록 했다(『정조실록』 2년 10월 28일).

또한 왕이 도성 밖으로 능 행차를 나갔다가 성문 닫을 시간이 지나 성문 닫는 것을 유보시킬 때에는 반드시 내명부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표신과 부험을 청해서 받은 뒤에야 열어두는 것을 허용하였다. 부험을 분실하면 장 90대, 도 2년 반에 처하며, 30일 이내에 찾으면 죄를 면하게 했다. 이 내용이 『대전통편』에 수록된 후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

형태

중국에 가는 사신이 지녔던 부험은 비단으로 짠 횡축에 말의 형상을 수놓았다고 한다. 1474년(성종 5)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으로 보낸 것은 주위(周圍)가 4촌(寸) 5푼[分]이고, 원지름[圓徑] 1촌 5푼이었다. 한 면(面)에는 ‘조선통신(朝鮮通信)’이라는 4자를 전자(篆字)로 썼고, 다른 면에는 ‘성화십년갑오(成化十年甲午)’라는 6자를 썼으며, 또 부(部)마다 한 면 좌우에 각각 제1부터 제10에 이르는 번호를 썼다(『성종실록』5년 12월 15일). 대개 형태는 비슷했을 것인데 제작 연도가 달랐던 것 같다.

도성 문을 열 때 사용하는 것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4대문에 모두 경마다 사용하는 것이 마련되었다. 둥근 모양으로 한쪽 면에는 어느 경부험(更符驗)이라고, 다른 한쪽에는 어느 문이라고 썼으며, 반으로 나눠 왼쪽은 대내에 보관하고 오른쪽은 각 문의 직숙처에 보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민간에서도 뒷날에 보고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서로 주고받는 신표를 때때로 부험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다. 역사상 매우 오래되고 유명한 것으로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부여를 떠나면서 그의 아들 유리에게 남겨놓았던 칼 조각이다. 이는 칠각형의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춰져 있었다. 유리는 이 칼 조각을 찾은 뒤 고구려로 가 주몽과 조각을 서로 맞춰봄으로써 부자 관계임을 확인하였다. 그 뒤에 비슷한 유형의 여러 이야기가 등장하였다. 특히 조선에 이르러 쌍가락지 이야기가 유명하였다. 즉, 정치적인 화를 당했던 집안의 여인네들이 쌍가락지를 신표로 나눠 가졌다가 훗날 죄가 씻어지면 혈육을 찾는 증거물로 그 쌍가락지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선민, 「당대(唐代)의 중앙-지방 통신 체계와 동어부(銅漁符)」, 『중국사연구』 25, 2003.
  • 윤훈표, 「조선 초기 발병부제(發兵符制)의 실시」, 『학림』 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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