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제원(普濟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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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보제원 |
한글표제 | 보제원 |
한자표제 | 普濟院 |
관련어 | 원위전(院位田), 원주(院主), 지영례(祗迎禮), 원주전(院主田),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집필자 | 홍성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보제원(普濟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7년 11월 20일, 『세종실록』 18년 8월 5일, 『세조실록』 3년 5월 7일, 『세종실록』 27년 1월 21일, 『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
조선시대에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 설치한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숙박 시설.
개설
보제원(普濟院)은 조선 세종대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밖에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의술을 베풀거나 연회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일대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에 위치하였으며, 한성부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별집 권16 「지리전고」 도성궁궐 조에는 보제원의 설치 시기가 조선 세조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제원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세종 연간으로, 세종대 이전에 도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院)’은 대개 여행객의 숙소로 설치되었는데, 보제원 역시 공무 여행자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국가에서 관리를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원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등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시설로, 역(驛)과 같은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역원(驛院)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역보다 숫자가 많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대로·중로·소로에 30리마다 원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원은 원래 국가에서 설치할 뿐 아니라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여 원의 경비에 충당하게 하는 등 그 관리도 국가에서 맡아보았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관리들의 관리가 소홀하여 원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세종대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원 인근의 주민 중에서 선량한 사람을 원주(院主)로 삼고 원주전을 지급하여 원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는 세종대에 보제원에 밭 2결 50부를 지급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7년 11월 20일).
보제원은 숙박 시설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구휼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필요할 때마다 한양의 각 원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운영하였는데, 진제장이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을 때 곡식을 내어 주거나 죽을 쑤어 주던 장소를 말한다. 이는 1436년(세종 18)에 도성에 사는 사람들과 성 밑에 사는 굶주린 백성을 위해 보제원의 진제장에서 구휼한 사례(『세종실록』 18년 8월 5일), 1457년(세조 3)에 기민(飢民)을 구제하기 위해 보제원 외에 이태원과 홍제원 등에도 진제장을 설치한 사례(『세조실록』 3년 5월 7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원과 달리 보제원에는 상설 진제장이 설치되었다. 지방에서 도성으로 몰려드는 빈민을 일시적으로 진휼하여 이들의 도성 진입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로 짐작된다.
한편 1445년(세종 27)에는 한성부에서 보제원의 진제장에 의원 1명을 배치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전염병의 확산을 막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7년 1월 21일). 보제원이 의료 기관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제원은 왕이 신하를 한양 밖에서 환송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는데, 이때 왕이 별도의 환송자를 지정하여 지방으로 내려가는 신하를 보제원에서 환송하도록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성부 조에 따르면, 기로소(耆老所)의 재상들은 상원(上元)과 중양(重陽) 즉 음력 1월 15일과 9월 9일에 보제원의 누각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주요 교통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4개의 역과 원에 연결되었는데, 그중 보제원은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위치하여 노원역과 연결되었다. 도성에서 출발하여 보제원을 거쳐 노원역에 이르는 길은 동북 2로의 초입에 해당하였으므로, 보제원은 여행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보제원은 숙박 시설로서의 기능보다는 구휼 및 의료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었다.
한편 숙종대에는 지영례(祗迎禮)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이후 영조·순조·철종·고종 연간에는 왕실의 장례를 치를 때 반우(返虞)와 지영(祗迎)을 행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원영일, 「조선시대 교통로와 역·원제의 고찰-서북로와 동북로를 중심으로-」, 『향토사연구』7,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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