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대사(報聘大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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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보빙대사 |
한글표제 | 보빙대사 |
한자표제 | 報聘大使 |
관련어 | 공사관(公使館),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보빙사(報聘使), 전권공사(全權公使), 전권대사(全權大使), 판리공사(辦理公使)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보빙대사(報聘大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1년 8월 4일, 『고종실록』 31년 8월 16일, 『고종실록』 31년 8월 29일, 『고종실록』 31년 9월 5일, 『고종실록』 41년 3월 26일, 『고종실록』 42년 12월 18일, 『고종실록』 43년 1월 10일 |
갑오개혁 이후 외국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외교사절의 대사.
개설
1894년(고종 31)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시행하면서 주변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보빙대사(報聘大使)를 파견하였다. 당시 8월 4일에 친일파가 다수를 차지하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방안으로 보빙대사의 파견을 추진하였다. 보빙대사는 명성과 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선택하되, 동경 주재 판리공사(辦理公使) 이외에는 교섭 사무에 익숙한 사람을 임명했다(『고종실록』 31년 8월 4일). 이때 박정양(朴定陽)이 일본 보빙대사, 이완용(李完用)이 전권공사(全權公使)로 임명되었다(『고종실록』 31년 8월 16일). 그런데 8월 29일에 특별히 종정경(宗正卿) 이준용(李埈鎔)을 보빙대사로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한다(『고종실록』 31년 8월 29일). 이후 보빙대사는 관료 중에서 차출하기보다는 왕실의 종친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가 된다. 특히 이준용이 보빙대사에서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자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으로 대체하는 것을 보면 보빙대사는 외국과의 의례적 관계를 돈독히 하고 각국 왕실과의 우호를 증진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31년 9월 5일)
담당 직무
외국과의 의례적 관계를 돈독히 하고 양국 왕실의 우애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
변천
1904년(광무 8) 법부 대신이지용(李址鎔)이 일본 보빙대사로 파견되었다(『고종실록』 41년 3월 26일). 1905년에는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일본 보빙대사로 임명되었다(『고종실록』 42년 12월 18일). 이재완의 수행원으로는 법부 대신이하영(李夏榮), 예식원(禮式院) 부경(副卿) 김규희(金奎熙), 군부(軍部) 교육국장(敎育局長) 이병무(李秉武), 평리원(平理院) 검사(檢事) 이규환(李圭桓), 무안감리(務安監理) 한창수(韓昌洙), 비서감(祕書監) 승(丞)한상룡(韓相龍), 예식관(禮式官) 고희준(高羲駿), 정위(正尉) 윤치성(尹致晟), 동경유학생감독(東京留學生監督) 한치유(韓致愈) 등이 임명되었다(『고종실록』 43년 1월 10일). 당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시기였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내정까지 장악하려던 때였다. 따라서 기존의 보빙대사가 의례적으로 파견되었던 것에서 일본의 강압적인 외교정책을 받아들이기 위한 임무를 띠는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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