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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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서울에 근대적 법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관립 법률 학교.

개설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는 조직과 운영 면에서 크게 3시기로 구분되면서 운영되었다. 제1기(1895~1896)는 설립기로, 일본인 교수진을 중심으로 일본식 법률 교육이 진행되었다. 제2기(1903~1905)는 확장기로, 법률 고문인 프랑스인 크레마지([金雅始], Crémazy, L.)를 중심으로 프랑스식 법률 교육이 이루어졌다. 제3기(1906~1909)는 일제 간섭기로, 통감부 정책에 따라 완전히 일본식 법률 교육이 수행되었다. 법관양성소에서는 제1회부터 제6회 졸업생까지 총 209명의 법관을 배출하여 근대 사법관 양성의 초석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근대적 사법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하기 위한 재판 기관의 구성, 둘째 소송 절차의 획일화, 셋째 근대적 사법 제도의 운영에 대비할 법관의 양성 등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정부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법관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1895년 법관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조직 및 역할

1895년 3월 「법관양성소 규정」이 공포되고(『고종실록』 32년 3월 25일), 「법관양성소 세칙」이 제정되어 같은 해 4월 법부대신의 직할 아래 법관양성소가 개소하였다. 입학 자격은 20세 이상의 남자로, 입학시험에 합격하거나 현직 관리인 사람이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시험은 한문, 작문, 역사, 지지(地誌) 등이었다. 정원은 약 50명으로 수학 기간은 6개월이고 교과목은 법학 통론,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현행 법률 및 소송 연습 등이었다. 초대 소장으로는 법부 참서관피상범(皮相範)이 임명되었다. 교수진은 피상범,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 C. R.), 초빙된 3명의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무렵 황후 시해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면서 친일 정권인 박영효 내각이 무너졌다. 이에 따라 일본인 교수진을 중심으로 교육하던 법관양성소는 유지되기가 어려워 문을 닫았다.

변천

법관양성소는 1903년(광무 7) 2월 다시 개소하였다. 이때 개소된 이유는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을 추진했던 ‘광무개혁’의 일환, 그리고 법률 고문 크레마지의 권유 등이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입학 자격은 20세 이상 35세 이하로 제한하였고, 사범학교·중학교·외국어학교 졸업자나 현직 관리는 입학시험이 면제되었다. 수학 기간은 1년 6개월이었다가 3년으로 연장되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교과목은 기존의 과목 이외에 산술과 작문이 추가되었는데, 전통 법률 과목인 대명률(大明律)·대전회통·무원록(無寃錄) 등이 중시되었다.

이 시기에 소장은 법부협판과 법부 참서관이 겸직하였는데, 재임 기간이 짧고 교체가 빈번했다. 교수진은 1903년 교관 12명으로, 주임관 3명과 판임관 9명을 두었고, 1904년에는 주임 5명과 판임 12명으로 증원되었다. 교수진은 크레마지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인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인은 없었다. 이들은 크레마지의 영향에 따라 법어(法語) 학교 출신과 법관양성소 졸업생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내정 간섭에 나섰다. 우선 을사조약 반대 운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소장과 교관을 경질하였다. 소장은 동경법학원 출신의 이면우(李冕宇)를 임명하고, 교수진도 석진형(石鎭衡) 등 일본에 유학하여 법률학을 전공한 한국인들로 임명하였다.

1907년(융희 1) 12월 칙령으로 「법관양성소 관제」를 다시 반포하고(『순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관직으로는 소장 1명, 교수 3명, 간사 1명, 조교수 3명, 번역관 2명, 주사 2명을 두었으며 번역관보 등도 두었다. 입학 자격은 1908년 3월에 개정된 학칙에 의해 17세 이상 35세 이하 남자 가운데 관립 일어 학교 또는 관립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동등 이상의 학력 소지자로 하였다. 1908년부터는 교육 기간이 1년인 별도의 예과(豫科)를 설치하였다. 수학 기간은 대체로 2년제로 운영되었다. 교과목은 법학 통론·헌법·민법·형법·상법·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행정학·국제법·경제학·재정학·외국어(일어) 등으로 증가하였다. 1908년 이후에는 수학·부기·체조 등이 추가되면서 일본 법학대학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따랐다. 마지막 제11대 소장은 일본인 노자와 다케노스케[野澤武之助]가 임명되었다. 교수진은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점차 일본인의 비중이 늘어났다.

1909년 11월 법관양성소는 법부에서 학부(學部)로 이관되고 그 명칭도 법학교(法學校)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박병호, 『근세의 법과 법사상』, 진원, 1996.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편, 『서울 법대 백년사 자료집: 광복 전 5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창회, 1987.
  • 송병기 외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Ⅰ)』, 국회도서관, 1970.
  • 양승두, 「법관양성소에 관한 소고」, 『세림한국학논총』1, 1977.
  • 최기영, 「한말 법관양성소의 운영과 교육」, 『한국근현대사연구』16, 2001.
  • 최종고, 「개화기의 법학 교육과 한국 법률가의 형성: 「법관양성소」와 「보전」의 교과와 교수진을 중심으로」, 『법학』45,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