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좌법석(百高座法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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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백고좌법석 |
한글표제 | 백고좌법석 |
한자표제 | 百高座法席 |
동의어 | 백좌강회(百座講會), 백좌도량[百座道場] |
관련어 | 소재법석(消災法席), 소재도량[消災道場],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인왕경(仁王經), 호국불교(護國佛敎)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백고좌법석(百高座法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8월 11일, 『세종실록』 6년 3월 21일 |
각종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100명의 고승이 법을 강설하는 불교 의식.
개설
백고좌법석(百高座法席)은 사자좌(獅子座) 100자리를 만들고 고승 100명을 초청해 설법을 듣는 법회로, 국가의 내란과 외우 등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인왕경』에 의지하는 법회이기 때문에 인왕도량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백고좌법석은 『작법절차』에 따라 행해졌는데, 100명의 법사를 청해 하루에 2회씩 경전을 강설하고 염송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라시대인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에 의해 처음으로 개설된 이래,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는 천변지괴를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100회 이상 개최되었다. 인왕도량으로 개최된 고려시대의 백고좌법석은 ‘호법이 곧 호국[護法則護國]’이라는 사상에 근거해 밀교식 소재도량으로 시행된 대표적인 국가 행사였다. 그러나 억불숭유를 정책 기조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개설된 예가 보이지 않는다.
연원
『인왕경』이라는 약칭으로 흔히 불리는 『불설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佛說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의 「호국품(護國品)」에는 다음과 같은 예화가 실려 있다. 옛날에 보명(報明)이라는 작은 나라의 왕이 천라국(天羅國)의 반족왕에게 붙잡혀 죽게 되었을 때, "사문을 반식(飯食)하고 삼보에 정례(頂禮)하려 하니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간청하여 과거7불(過去七佛)을 위한 백고좌회를 베풀었는데, 그 공덕으로 인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 혹은 재승(齋僧)은 이 『인왕경』의 연기 설화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변천
(1) 신라시대
『삼국사기』에 따르면, 551년에 백고좌법석이 처음으로 개설된 뒤 약 60년이 지난 613년(신라 진평왕 35) 7월에 수나라의 왕세의(王世儀)가 사신으로 와서 황룡사에서 백좌도량을 개설하였다. 이때 여러 고승을 초청해 경전을 강설하게 하였는데, 원광(圓光)이 최상위에 올랐다고 한다. 또 636년(신라 선덕왕 5) 3월에는 와병중인 선덕여왕의 치유를 빌기 위해 황룡사에 백고좌를 시설하여 승려 100명을 득도하게 하였고, 877년(신라 헌강왕 3)에 헌강왕은 백고좌법회를 열고 그와 함께 재승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라시대에는 백고좌법석과 관련된 법회가 10회 이상 개최되었다.
(2) 고려시대
신라시대의 백좌회는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인왕백고좌도량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1012년(고려 현종 3) 5월에 승려들을 모아 내전에서 『인왕반야경』을 강설하였는데, 이것이 기록으로 전하는 고려시대 최초의 백좌회에 해당한다. 이능화(李能和)가 1918년에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1020년(고려 현종 11) 5월 1일에 내전에 100개의 사자좌를 설치하고 3일 동안 『인왕경』을 강설하였으며, 이후 해마다 이를 정례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의천(義天)의 시문집인 『대각국사문집』 제1권에도, 3년마다 한 번씩 인왕반야백고좌회를 개최하고 재승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때 음식을 대접 받은 승려의 수가 30,000명에 이르렀으며,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인왕백고좌회는 2년 또는 3년마다 개설되는 정기적인 의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백고좌법석은 구체적인 실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예조 전서 조박(趙璞)의 상서(上書)와 도당에 내린 태조의 교지(『태조실록』 1년 8월 11일), 백고좌를 궁궐에 설치하고 왕이 친히 제자의 예를 올렸음에도 복을 얻기는커녕 난망(亂亡)에 이르렀다는 양봉래(梁鳳來) 등의 상소(『세종실록』 6년 3월 21일)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조선전기에 왕실에서는 백고좌법석의 전통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또한 『인왕경』을 바탕으로 호국의 이념을 내세우는 국가 차원의 호국법회가 아니라 왕실의 복을 비는 법회 수준으로 설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절차 및 내용
『인왕경』「호국품」에 따르면, 국토가 어지러워지고 재난과 도적이 생기려 할 때 왕은 반야바라밀다를 기억하여 외우고 도량을 장엄하게 꾸며야 한다. 100개의 부처 형상, 보살상, 나한상을 모시고, 100명의 법사를 청해 100개의 사자좌에서 이 경을 설한다. 모든 자리 앞에 갖가지 등을 켜고 갖가지 향을 사르고 여러 꽃을 흩으며, 의복·와구(臥具)·탕약·방사(房舍)·자리[床座] 등을 널리 공양하면서 매일 2회씩 경을 읽는다. 만약 왕과 대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를 듣고 기억하여 따르면 재난이 곧 사라지고, 온 나라의 한량없는 귀신과 권속이 이 경을 들으면 국토를 보호한다고 한다. 이때 한량없는 귀신은 통속적인 의미의 신이 아니라 팔식(八識)의 근본 마음 곧 반야바라밀을 깨달은 마음을 뜻한다. 결국 전도(顚倒)된 마음을 반야의 지혜로 전환해야 국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00명의 법사를 청해 하루에 2회씩 경전을 강설하고 염송하는 것이 백고좌법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작법절차(作法節次)』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 운주사, 2006.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정태혁, 『한국불교융통사』, 정우서적, 2002.
- 문상련, 「한국불교 경전신앙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