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종(問辰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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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에 관상감에서 청나라를 통해 들여온 서양의 자명종을 모방해 영조 때 완성한 좌식 시계. 또는 청나라를 통해 들여온 서양의 자명종을 모방해 만든 좌식 시계.

개설

경종대인 172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밀창군(密昌君)이직(李樴)이 청나라 황제로부터 문신종(問辰鐘)의 일종을 받아 왔다. 이것은 오늘날의 자명종과 비슷한 형태의 시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상감에서 이것을 복제하여 만들 것을 요청하여 1725년(영조 1)에 완성하였다.

연원 및 변천

1723년 밀창군이직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로 떠났고(『경종실록』 3년 4월 2일), 같은 해 9월 귀국하였다(『경종실록』 3년 9월 7일). 이때 청나라 황제로부터 서양의 시계를 하나 받아왔는데, 그 구조와 방식이 정밀하고 교묘하여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비올 때나 흐릴 때나 쉽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었으므로, 관상감에서 복제하여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경종실록』 3년 10월 9일). 『국조보감』에는 경종 3년 8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복제 작업이 언제 끝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728년(영조 4)에 영조가 직접 쓴 세자 경의군(敬義君)의 행장에 따르면, “관상감에서 문신종을 바쳤으나, 이것도 한 번 보고는 서당(書堂)에 두었는데, 젊은 내관이 우연히 손상을 입힌 것을 너그럽게 용서하였더니, 세자가 하찮은 물건 때문에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은 좋지 않다며 웃은 일을 보고 세자의 너그러운 도량을 칭찬했다”고 한다(『영조실록』 4년 11월 26일). 경의군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1725년의 일이므로 문신종은 1725년에서 1728년 사이에 완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25년 11월 9일 관상감에서 보고하기를 “문신종 1좌와 문종(問鐘) 2좌를 관상감에서 수리하고 개조하라고 하교하셨는데, 문신종의 경우는 이미 수리하고 2좌를 복제하여 올릴 수 있으나 문종은 구조가 너무 세밀하고 정교하여 우리나라 장인이 수리하고 제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도로 반납한다”고 하였다.

형태

경종 때 청나라에서 들어온 문신종과 이를 복제하여 영조 때 완성한 문신종은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그 정확한 구조와 사용법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문신종의 개수를 세는 단위가 좌(坐)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세워 놓는 작은 시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오연행록』 제5권 기미년(1799, 정조 23) 1월 27일자 기록에 따르면, ‘기생이 허리에서 문시종(問時鐘)을 내어 고동을 떼고 보더니’라는 구절이 있다. 문시종은 휴대용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어두운 밤중에도 고동을 누르면 때를 알려주는 시계라고 하므로 오늘날의 회중시계로 짐작된다. 회중시계는 18세기 영국에서 주로 제작되었으며, 균형바퀴와 태엽을 사용하였다. 이 문시종은 문신종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경종 때 들어온 문신종도 고동 즉 버튼을 누르면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였으며 다만 휴대용이 아니라 앉혀 놓고 사용했던 종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문신종은 오늘날 우리가 자명종이라고 부르는 시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우리나라에 유럽의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31년(인조 9) 정두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게스에게서 자명종을 받아온 것이 최초이다. 김육(金堉)의 『잠곡필담』에 따르면, 효종(孝宗) 때 유흥발(劉興發)이 일본 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을 연구하여 그 구조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 관상감 천문학교수송이영(宋以頴)이 자명종을 만들었는데(『현종실록』 10년 10월 14일), 이것이 오늘날 국보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는 혼천의(渾天儀) 및 혼천시계(渾天時計)이다. 1715년(숙종 14)에는 관상감 관원이던 허원(許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본떠서 새로운 자명종을 만들었다고 한다(『숙종실록』 41년 4월 18일).

참고문헌

  • 『잠곡필담(潛谷筆談)』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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