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장(刀子匠)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국가나 개인이 필요로 하는 소규모의 칼을 만드는 장인.

개설

도자장(刀子匠)은 도장(刀匠)이나 대정(大丁)이라고도 하였으며, 대정은 칼을 만들 뿐만 아니라 쇠붙이로 된 물건도 만들었다. 조선전기에는 상의원(尙衣院)에 도자장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의 경우에는 도자장이 아닌 야장(冶匠)이 칼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신분은 양인 또는 천인으로 사회적으로 천시되었다.

담당 직무

환도장(環刀匠)이 주로 무기로 쓰던 칼을 제작하는 반면, 도자장은 장식용 칼부터 생활에 필요한 칼 등을 만들었다. 조선후기 『의궤(儀軌)』에 의하면 왕실 관련 비석을 만들 때에도 도자장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돌을 캐거나 다듬는 석장(石匠)이 필요로 하는 도구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부터 도자(刀子)는 외국 사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물품 가운데 하나이므로 도자장은 이런 수요에 응하여야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을 방문할 때 도자를 선물하거나 팔았기 때문에 경기도, 개성, 황해도, 평안도에서는 사신에게 도자를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다(『세종실록』 5년 6월 3일). 이 지역의 도자장이 이를 제작하였는데 평안도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세종실록』 13년 11월 22일).

지방 도자장의 기술은 중앙의 장인보다 낮았다. 세조 때 왕은 진상하는 칼의 재료를 생철로 쓰지 말고 칼날을 갈도록 지시한 적도 있으며(『세조실록』 11년 11월 10일), 연산군 때에도 진상품을 다시 만들라고 한 적도 있었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27일). 조선후기에는 도자장이 도자전(刀子廛)을 개설하여 생산뿐만 아니라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자장은 도자전의 시전 상인과 갈등을 빚어 여러 번 소송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때 도자장은 군영에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1725년(영조 1)에 상의원에서 그를 소속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군병(軍兵)을 다른 역으로 옮길 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하여 실패한 적도 있다. 조선후기 때 도자를 만드는 도자방(刀子房)은 서울에 여러 곳이 있었으며 도자를 파는 도자전은 종루 거리 위에 있었다.

변천

조선초기에 경공장(京工匠)인 도자장은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노야장(爐冶匠), 주장(鑄匠)을 포함하여 90명이 있었으며 한 번에 30명씩 근무하였다. 또한 이들은 체아직을 받았는데 부전사(副典事) 1명, 급사(給事) 1명, 부급사(副給事) 2명으로 비교적 다른 장인보다 대우를 받았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상의원에만 도자장이 6명이 있었다. 지방관청에 소속된 도자장은 없었으나, 조선후기 때 전라도에 도자장이 5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방에서도 도자장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장은 각종 국역(國役)에 동원되었는데, 1759년(영조 35)에 상의원의 도자장 13명, 공조(工曹)의 도자장 12명이 앵봉(鶯峰)에 땅을 쌓는 데 동원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상의원의 도자장 5~6명이 1744년(영조 20)에 도자전 사람 20명과 함께 종루에 도자전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장도를 비롯하여 은비녀, 패물, 담배통 등을 팔았다. 1791년(정조 15)에 상의원에 속한 도자장 24명 가운데 12명은 도자전 운영을 하지 않고 원래의 도자장 역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12명은 이 사람들이 빠질 경우에 도자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묵재일기(黙齋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한경식략(漢京識略)』
  • 이재필 등,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민속원, 2006.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