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봉문(丹鳳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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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남쪽 궁장에 설치한 문.

개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돈화문(敦化門)의 남쪽 바른편을 단봉문(丹鳳門)이라 하고, 동쪽 문을 건양문(建陽門)이라 했으며, 바로 이 문 밖 동편이 창경궁(昌慶宮)이라고 했다.

내용

창덕궁에 드나드는 여러 문 중에서 남쪽 궁장에는 오직 단봉문 하나만 설치되었다. 돈화문 동쪽에 단봉문이 있고, 돈화문 서쪽 궁장에는 금호문(金虎門)이 있어, 각 문마다 출입할 수 있는 관리들의 자격이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경지략』에는 대부분의 신하는 금호문을 이용해 출입하며 사헌부(司憲府) 관원만 꼭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자격 구분은 신하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맺어진 것이며, 실제로 정해진 규정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여러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 1731년(영조 7) 4월 20일자 기록에는 이광보(李匡輔)가 왕에게 “궐문 중 선인문(宣仁門)과 금호문은 조사(朝士)들이 출입하는 곳이고, 단봉문과 통화문(通化門)은 여인 및 액례배(掖隷輩)들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번 죄인은 통화문을 통하게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라고 전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영조는 선인문, 금호문, 개양문(開陽門) 모두 조신들이 출입하는 곳이며, 단봉문 역시 조신들이 출입하는 곳이라는 하교를 내렸다. 비록 영조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하들은 단봉문에 대해 궁궐의 여인들 및 아전급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궐문의 출입에 신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은 정조 연간에도 찾아볼 수 있다. 대궐문은 저녁이 되면 한 곳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닫는다. 이를 제외한 다른 문은 왕이 직접 내주는 표신이 있어야만 일시 개방할 수 있었다. 1789년(정조 13)에 병조(兵曹) 당상관이 당직 교체를 위해 금호문 출입 표신을 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궐 안의 각 문을 유문(留門: 문을 개방하는 것)했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臺臣)들이 근래에는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통화 두 문도 구애받지 않고 출입했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은 대간(臺諫)에, 금호문은 조신(朝臣)에, 단봉문은 중관(中官)에, 선인문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시켜 마치 서로 어겨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할 때에도 열린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유문할 때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정조실록』 13년 1월 19일). 하지만 정조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와 유사한 내용이 『승정원일기』 1793년(정조 17) 9월 28일자에 다시 기록되어 있다.

단봉문 출입에 관한 것들 중 눈에 띄는 내용은 여성과 관련한 것이 많다. 1778년(정조 2)에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사를 위해 후궁을 간택한 일이 있다. 6월 10일에 초간택(初揀擇)을 실시할 때 처녀들이 입궐하는 문로를 어디로 할지에 대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이때 문로는 단봉문으로 결정했다.

궁궐 안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이 단봉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간 경우도 많았다. 『승정원일기』 1673년(현종 14) 4월 27일자에는 명혜공주(明惠公主)의 상차(喪次)가 단봉문을 통해 나간 일이 기록되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의빈(宜嬪)의 상구(喪柩)가 단양문(端陽門)을 거쳐 단봉문을 나가 견여(肩輿)에 옮겨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으로 봉안했다는 내용이 있다(『정조실록』 10년 9월 16일). 1832년(순조 32)에도 복온공주(福溫公主)의 상례 때 출궁하는 문로로 단봉문이 기록되었다(『순조실록』 32년 5월 12일).

1701년(숙종 27)에는 숙종의 빈인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창경궁 취선당(就善堂)에서 자결했다. 이때 그녀의 시신이 어느 문을 통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숙종실록』 27년 10월 10일). 앞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장희빈(張禧嬪)의 시신은 건양현(建陽峴)을 거쳐 단봉문으로 나가는 것이 마땅한 출궁로였다. 하지만 건양현은 창덕궁 협양문이 위치한 곳으로 차비문이 있는 곳이었다. 숙종은 자신이 있는 곳 바로 정면으로 장씨의 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 장씨의 상여는 선인문을 통해 나갔다. 선인문은 2칸으로 만들어졌는데 정문은 북쪽의 대문이며 남쪽에는 격을 낮춘 소문(小門)이 있다. 장씨의 상여는 남쪽의 소문을 통해 출궁했다.

궁궐에서 친국(親鞫)을 진행할 때 경희궁은 금상문(金商門), 창경궁은 내사복시(內司僕寺), 창덕궁은 숙장문(肅章門)에서 실시하였다. 『은대편고(銀臺便攷)』「형방고」 친국조에 따르면 친국을 진행할 때 궁궐 밖에 있던 죄인이 입궁하는 문로로 경희궁은 흥원문(興元門), 창경궁은 통화문, 창덕궁은 단봉문을 이용한다고 기록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당시 창덕궁으로 진입할 때 모든 궁궐문이 닫혀 있어 김류(金瑬)가 단봉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잇달아 인조가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 홍진도(洪振道)와 더불어 단봉문을 통해 창덕궁에 들어왔다. 이후 김류가 인조를 인도해 인정전 서쪽 마당에 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았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은대편고(銀臺便攷)』
  • 『한경지략(漢京識略)』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