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경(盧善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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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의 문신. 초명은 노진경(盧晉卿)이다. 일명 노진해(盧晉諧)라고 부른다. 행직(行職)은 상서원 판관(判官)⋅사간원 사간(司諫)⋅사헌부 집의(執義)이다. 자(字)는 양필(良弼)이고, 호(號)는 동악(東岳)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고성(固城)이다. 만년에 경상도 합천 초계(草溪)에 살았다. 아버지는 도염서 승(丞)노갑생(盧甲生)이고, 어머니 동성이씨(東城李氏)는 이욱(李稶)의 딸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35년(세종 17)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1436년(세종 18) 중시(重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대간(臺諫)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간관(諫官)으로 활동하였다.

세조 시대 활동

1464년(세조 10) 승려 원각(圓覺)이 세조에게 건의하여 도성(都城) 안에 절을 짓고, 또 왕에게 황곡사(篁谷寺)에 가서 불사(佛事)를 행하였으나, 조정의 공경(公卿) 이하 대신들이 아무도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간원 사간노선경이 상소하여 극간(極諫)하기를, “간관(諫官)으로 있는 자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어찌 그 죄를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요승(妖僧)을 처형하지 않는다고, 전하의 춘추(春秋)가 연장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편안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대간의 탄식을 전하께서 어찌 듣지 못하십니까.”하니, 세조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노선경은 나의 주석(柱石)과 같은 신하이다.”하고 요승 원각을 즉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 뒤에 사헌부 집의가 되어, 직간(直諫)을 하다가,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경상도 함양군수로 좌천되었으나, 바로 사임하고 고향 고성(固城)으로 돌아왔다. 다시 고령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합천 초계(草溪)의 중방리(中方里)에다 서실(書室)을 짓고 ‘동악(東岳)’이라고 일컫고, 거문고를 뜯고 글씨를 쓰며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묘갈음기]

저서로는 『동악고(東岳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정직하고 강직하여, 왕에게 자주 직간(直諫)을 하였다. 세조가 그의 강직함을 높이 사서, 본래의 진경(晉卿)이라는 이름 대신에 선경(善卿: 훌륭한 신하)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내려주었다.

부인과 후손

경상도 창녕(昌寧)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지은 노선경의 「묘갈음기(墓碣陰記)」가 남아 있다.[『광주노씨세고(光州盧氏世稿)』 부록, 『성재집(性齋集)』 권26]

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군수성구(成懼)의 딸이고, 우의정성봉조(成奉祖)의 손녀이다.[<방목>] 자녀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노필(盧珌)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고, 유일(儒逸)로서 공조 좌랑(佐郎)⋅경상도 도사(都事)를 지내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며, 차남 노탁(盧琢)은 사직(司直)을 지냈고, 삼남 노적(盧𤨬)은 사직을 지냈고, 사남 노근(盧)은 시직(侍直)을 지냈으며, 딸은 군수박계조(朴繼祖)의 아내가 되었다.[『성재집(性齋集)』 권26]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주노씨세고(光州盧氏世稿)』
  • 『성재집(性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