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긍(盧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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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8년(영조 14)∼1790년(정조 14) = 53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신. 자(字)는 신중(愼仲)⋅여림(如林)이고, 호(號)는 한원(漢源), 또는 산주파(散珠坡)⋅도협(桃峽)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노명흠(盧命欽)이다. 정파는 시파(時派)에 속하여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과시(科詩)를 잘 지었고, 소설 『화사(花史)』를 지었다.

영조 시대 활동

1765년(영조 4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집안이 가난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 집안의 문객(門客)으로 있었다. 그때 벽파의 모함으로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시파의 영수 홍봉한도 몰락하자, 시파를 지지하던 노긍도 정거(停擧: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형벌)를 당하여,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이에 과거장에서 과거 시험에 출제된 시(詩)를 대신 지어주고 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과거 제도는 부정(不正)이 많았는데, <봉미(封彌) 역서(易書)> 제도에 의하여 채점의 부정을 막기 위하여 응시자의 시험 답안지에 그 이름을 가리고, 또 아전들로 하여금 그 답안지를 다시 옮겨 쓰게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지은 글로써 바꾸어 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 시대 활동

1777년(정조 1) 1월에 사간원 사간(司諫)이현영(李顯永) 등이 전국의 사림(士林) 가운데 여론을 조성하고, 사풍(士風)을 어지럽히는 인물들을 골라서, 서울의 고봉환(高鳳煥), 송도(松都: 개성)의 이환룡(李煥龍), 호남(湖南)의 이행휘(李行輝)호서(湖西: 충청도)의 노긍 등을 먼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청하자, 정조가 이를 허락하여, 노긍은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6년이 지나서 1782년(정조 6)에 유배에서 풀려나서, 고향 청주로 돌아왔다. 과시(科詩)로써 명성을 떨쳤으며, 소설 『화사(花史)』를 저술했다.

1976년 그 후손들이 노긍의 전해오는 글들을 모아서 『한원문집(漢源文集)』을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영민(穎敏)하고 글재주가 있었다.

진사시(進士試)에서 과시(科詩)를 잘 지었다고 명성을 크게 떨치자, 충청도 지방 사림(士林)에서 추앙하였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정조]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경재집(敬齋集)』
  • 『낙하생집(洛下生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박옹시초(泊翁詩鈔)』
  • 『소눌집(小訥集)』
  • 『안와유고(安窩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월고집(月皐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 『호보(號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