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제(南泰齊)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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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태제 |
한글표제 | 남태제 |
한자표제 | 南泰齊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경종~정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원진(元鎭), 관보(觀甫) |
호 | 담정(澹亭), 학야(鶴野) |
시호 | 청헌(淸獻)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99년(숙종 25) |
사망 | 1776년(정조 즉위) |
본관 | 의령(宜寧) |
주거지 | 서울[京] |
증조부 | 남훤(南翧); 문과 급제, 경상도 감사(監司) |
조부 | 남치훈(南致熏); 문과 급제, 도승지(都承知)⋅형조 참판(參判)⋅강원도 감사(監司) |
부 | 남필명(南弼明); 진사(進士), 도정(都正) |
모_외조 | 평산신씨(平山申氏); 한성부 판윤(判尹) 신후재(申厚載)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 풍천임씨(豊川任氏); 진사(進士) 임달원(任達元)의 딸 (둘째부인) 고령박씨(高靈朴氏); 생원(生員) 박시원(朴始遠)의 딸 (셋째부인) 정씨(鄭氏); 정박(鄭欂)의 딸 |
자녀 | (1자) 남현로(南玄老); 문과 급제, 이조 참의(參議), 대사성(大司成) (2자) 남경로(南庚老) (3자) 남인로(南寅老); 진사(進士), 돈녕부 동지사(同知事)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태제(南泰齊) |
총론
[1699년(숙종 25)∼1776년(정조 즉위) = 78세.] 조선 후기 경종~정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홍문관 제학(提學)이고, 시호은 청헌(淸獻)이다. 자(字)는 원진(元鎭)⋅관보(觀甫)이고, 호(號)는 담정(澹亭)⋅학야(鶴野)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도정(都正)남필명(南弼明)이고,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한성부 판윤(判尹)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도승지남치훈(南致熏)의 손자이고, 예조 판서남태기(南泰耆)와 병조 판서남태회(南泰會)의 4촌이다.
경종 시대 활동
1723년(경종 3) 증광시(增廣試) 생원과(生員科), 진사과(進士科) 양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사마방목>]
영조 시대 활동
1727년(영조 3)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문과방목>]
1728년(영조 4) 춘추관 사관(史官)에 임명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해 청주(淸州)에서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진압되자, 이인좌 등 죄인 들을 국문하는 데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양무공신(揚武功臣)을 책훈할 때 그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예조 좌랑(佐郎)이 되었고,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병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1734년(영조 10)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영의정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전라도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1735년(영조 11)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장악원 첨정(僉正)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그 뒤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743년(영조 19)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의와 형조 참의를 거쳐, 강화도 유수(留守)로 나갔다. 그 뒤에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이 되었다.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개성부 유수(留守)로 나갔다.
1760년(영조 36)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어, 돈녕부 지사(知事)가 되었고,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어, 내의원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하여,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다가, 예조 판서가 되어, 세자 우빈객(右賓客)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경기 감사(監司)로 나갔다가,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1767년(영조 43)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768년(영조 44) 나이가 70세라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라났다.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정조 시대 활동
1776년(정조 즉위)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8세였다.
후손
첫째부인 풍천임씨(豊川任氏)는 진사(進士)임달원(任達元)의 딸이고, 둘째부인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생원(生員) 박시원(朴始遠)의 딸이고,[<방목>] 셋째부인 정씨(鄭氏)는 정박(鄭欂)의 딸이다.[족보] 장남 남현로(南玄老)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參議)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차남은 남경로(南庚老)이고, 삼남 진사(進士)남인로(南寅老)는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손자 남이익(南履翼: 남인로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判書)를 지냈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
- 『가정유고(柯汀遺稿)』
- 『가정집(柯汀集)』
- 『관암전서(冠巖全書)』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우집(騎牛集)』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서원등록(書院謄錄)』
- 『성호전집(星湖全集)』
- 『순암집(順菴集)』
- 『오천집(梧川集)』
- 『유회당집(有懷堂集)』
- 『이계집(耳溪集)』 『지암유고(止庵遺稿)』
- 『청천집(靑泉集)』 『하곡집(霞谷集)』
- 『학고집(鶴臯集)』
- 『활산집(活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