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온(南泰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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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1년(숙종 17)∼1755년(영조 31) = 65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대사간(大司諫)⋅형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치화(稚和)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남효명(南孝明)이고, 어머니 유씨(柳氏)는 감사(監司)유이복(柳以復)의 딸이다. 승지(承旨)남지훈(南至熏)의 손자이고, 도승지(都承知)남태량(南泰良)의 형이다.

숙종 시대 활동

1714년(숙종 40)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사마방목>]

영조 시대 활동

1728년(영조 4)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문과방목>]

1729년(영조 5) 춘추관 사관(史官)에 임명되어,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730년(영조 6) 승문원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찬수청 낭관(郎官)을 겸임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집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사복시 주부(主簿), 병조 좌랑(佐郎),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731년(영조 7) 황해도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734년(영조 10)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 뒤에 사헌부 지평(持平)과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여 세자(世子: 경종)을 가르쳤다. 그 뒤에 장악원 정(正),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1739년(영조 15)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으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742년(영조 18) 다시 복관되어,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황해도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갔다.

1745년(영조 21)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747년(영조 23)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갔다가, 대사간을 거쳐, 다시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강원도영월부사(寧越府使)로 나갔고,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1754년(영조 30)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가,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고, 대사간을 거쳐 승문원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함경도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1755년(영조 31) 관사에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65세였다.

후손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서태(李瑞泰)의 딸이다.[<방목>] 장남 남미로(南眉老)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남이로(南頤老)이고, 3남 진사(進士)남희로(南羲老)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손자 남이형(南履炯: 남희로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갑인연행별록(甲寅燕行別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록집(歸鹿集)』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재간집(在澗集)』
  • 『학당유고(鶴塘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