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南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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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기호품인 담배 또는 담뱃잎.

개설

남초(南草)는 한해살이 식물인데, 그 잎으로 기호식품인 담배를 만든다.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남초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전후 시기이다. 담배를 태우는 법이 일본을 통해 조선에 전래된 것이다. 남초는 도입된 이후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하인에 이르기까지 태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크게 유행하여 곧바로 굳건한 기호품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미 17세기 초반에 피우는 차라는 뜻의 연다(烟茶)라 병칭될 정도로 널리 보급되어 재배되었다.

형태 및 생태

남초는 가지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중앙부 고원지이며, 1558년 스페인 왕 필립 2세가 원산지에서 종자를 가져와 관상용·약용으로 재배하면서부터 유럽에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 관련 사항

남초가 조선에 전래된 직후 관련 경작법이 개발되었다. 농서에 보이는 첫 번째 남초 경작법은 고상안(高尙顔)의 『농가월령(農家月令)』에 나온다. 이 기록에는 2월 경칩에 남초 종자를 뿌리고, 5월 망종에 옮겨 심는 방법, 종자에 시비를 넣어주는 방법 등이 기재되어 있다.

남초가 기호품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더불어 남초 생산도 크게 확대되었다. 남초와 목화는 일찍부터 시장에 내다팔 것을 목표로 재배하는 상품작물이었다. 남초 생산으로 농민들은 소득을 취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와 더불어 평안도 지역이 남초 산지로 유명하여, 서초(西草) 또는 향초(香草)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호남의 진안, 장수 등도 연초 산지로 알려졌다. 그리고 남초는 면포, 미곡과 더불어 전국의 절반 이상의 장시에서 취급되는 상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남초 재배를 통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정약용은 남초 재배의 소득이 수전(水田) 상상등(上上等)에 비해 10배나 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남초 재배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비옥한 농지가 급속하게 남초 재배 농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남초의 상품화가 촉진되면서 한전의 비옥한 전토가 소득이 큰 남초전(南草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남초전이 곡물을 생산하는 전답의 본래 의미를 갉아먹는 원흉으로 지목하고 이를 금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기호품이 된 데다 그것을 재배하는 농민들은 그 어떤 작물 재배보다 큰 이익을 남겼으므로 남초 재배를 금지하려는 시도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남초 즉 담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호품이었다. 담뱃대 길이가 담배 피는 사람의 신분과 비례한다고 여겨졌다. 또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담배와 관련된 구전설화 중에는 담뱃불이 화재발생의 원인이었음을 지적한 것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민간에서는 담배가 가래를 삭혀주고 콧병을 낫게 한다고 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담배와 관련된 「담바구타령」 등 여러 민요도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 장유(張維), 『계곡만필(谿谷漫筆)』
  • 김용섭, 「조선후기의 경영형 부농과 상업적 농업」, 『증보판조선후기농업사연구』Ⅱ , 일조각, 1990.
  • 이영학, 「한국 근대 연초업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이영학, 「18세기 연초의 생산과 유통」, 『한국사론』 13,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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