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관(南胄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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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24년(경종 4)∼졸년 미상.]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문신. 자(字)는 백교(伯敎)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남학조(南鶴祚)이고, 어머니 임씨(任氏)는 임달원(任達元)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50년(영조 26) 경오(庚午)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1761년(영조 37) 12월 영조가 숭현문(崇賢門)에 친림(親臨)하여 유생들에게 제주도 감귤(柑橘)을 내려주고 시취(試取)하였는데, 진사 남주관이 반감시사(頒柑試士)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영조가 수석을 차지한 유생 남주관을 불러서 보고 『서전(書傳)』을 외우게 하였는데, 남주관이 거침없이 잘 외우자, 급제(及第)를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1762년(영조 38)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보임되었다.

1769년(영조 45)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1771년(영조 47)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8)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전라도 좌수사(左水使)조혜진(趙惠鎭)의 탐학(貪虐)을 탄핵하였다.[『영조실록』 48년 7월 14일 1번째기사] 그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 예조 좌랑(佐郞), 사헌부 지평, 황해도 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